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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과 생일초등학교 2학년인 손녀는 바쁘다. 영상통화라도 한 번 하려 하면 시간을 잘 맞추어야 한다. 병원에 계신 외증조할머니를 뵈러 와서 영상통화로 얼굴이라도 보여드리려 하는데 생일 파티 중이란다. 같은 날 생일인 친구가 있어 초대도 받고, 본인 생일에 초대도 하고 보니 하루가 짧은 모양이다. 다행히 올해 생일은 일요일이라 그나마 아들이 데리고 다니며 생일잔치를 하고 있나 보다. 면소재지의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녀는 우리 지역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같은 반 친구라야 고작 10명 정도이다. 내 생일 선물로 사이드테이블을 보내면서 ‘올해 희연이 생일은 룸을 빌려서 해달랍니다. 요즘 다들 그렇게 한 대요.’ 멋쩍게 웃으며 건네던 큰아이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증조할머니랑 눈도 맞추지 못하고 짧게 통화를 끝냈다. 조금 후 보내온 동영상에는 악을 쓰며 불러주는 친구들의 ‘생일 축하합니다.’는 노래가 아니라 함성이었다. 친구들은 노래를 끝내고 준비해온 선물들을 전하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로 깔깔대며 웃고 있다. 행복한 모습이어서 다행이다. 저 맑은 모습으로 평범하게 세상을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양력으로 생일을 챙기는 젊은 세대와 달리 아직도 음력 생일이 진짜 생일인 것 같은 나도 작년부터 양력을 쇠기로 하였다. 내가 태어난 해의 양력이 손녀의 생일과 같았다. 우연이지만 싫지 않은 우연이다. 손녀와 같은 날을 내생일로 정하고 아이들에게 미리 가지고 싶은 것의 목록을 보낸다.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자.’ 가 아니라 선수를 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이다.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평소에 가지고 싶었지만 내돈으로 사고 싶지 않았던 물품을 골라 미리 보낸다. 생일 전에 나는 생일 선물을 받고 기분이 좋아진다. 올해는 손녀의 생일 선물은 보낼 수 없는 해다. 요란한 이모티콘으로 메시지만 보냈을 뿐이다. ‘가족 여러분께 알립니다.’로 시작한 아들의 요구사항은 ‘올 1년간은 희연이에게 일절 선물과 용돈은 보내지 말아 주세요.’였다. 물건이 귀한 줄도, 주변 사람들의 고마움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할머니나 이모할머니들에게 하나밖에 없는 손녀인지라 시도 때도 없이 보내는 선물꾸러미가 많았다. 아들의 용단이 대견했다. 정말 귀하게 여긴다면 어떻게 교육하고 양육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된다. 그런 결심을 한 부모이지만 아이들 사이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라 생일 파티는 원하는 곳에 가서 해주기로 했단다. 다섯이나 되는 자녀들의 생일을 해마다 집에서 챙기던 어머니는 지금 병원에 계신다. 아침 일찍 일어나 미역국과 갖은 나물을 준비하여 작은 소반에 차려놓고 빌고 계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린 시절 이것저것 챙겨 먹이신 어머니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참 건강한 편이다. 병원에 가는 일도, 나이 들면서 흔히 생기는 고혈압이나 당뇨 등 성인병을 앓는 형제들도 하나 없다. 일찍 혼자가 되신 어머니는 여럿인 우리를 챙기셨지만 정작 한 분인 어머니를 챙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죄스럽다. 병원에 계시는 동안 어머니의 생신도 지나갔다. 골다공증이 심해 갈비뼈 여러 개에 금이 가서 통증이 심하시다. 큰병 없이 잘 지내주셨는데… 벚꽃이 한창인 작년 이맘때, 정동원 팬이 되신 어머니가 어린 시절 동원이 사진을 보시며 웃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벚꽃이 만개한 그 길에 다시 가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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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 수출구조 재설계대한민국은 석유 정제 시설에 성공적으로 투자하여 석유 제품 수출국이다. 우리나라 수출 품목 중 2위에 해당한다. 수출로 얻는 이익으로 국내 자동차 연료로 쓰이는 휘발유 대금을 갚고도 남는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이 산유국이라는 명칭이 이상하지 않다. 역발상을 성공시킨 사례이다. 석유가 안 나오는 나라이지만, 석유 정제 시설을 세계에서 가장 효율 높게 지어서, 국내 소비 석유를 자가 충당하고, 수출로 수입 원유 대전을 벌충하고, 양호한 국내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자는 구상이 훌륭했다. 정유시설 설계 등 엔지니어링 기술이 발달해 전 세계에 대한민국 기술과 설비가 수출되고 있다. 중화학 산업 육성의 지혜가 꽃을 피우고있다. 폴란드에 방산 수출이 대거 이루어 지면서 대한민국은 방산 수출 성장기에 접어들었다. 석유산업에 혼이 있었다면 방산에는 규정에 억 매인 방위산업청 공무원들의 회초리 소리만 들린다. 군에서 요구하는 방산품을 가장 경쟁적인 조건으로 구매하는 것이 방위산업청 공무원이 하는 일인가? 방산 계약 차질로 메이저 방산업체 2곳이 곤욕을 치루고 있다. 무려 1천억이 넘는 지체상금(페널티)를 부과 받고 억울하다고 소송 중에 있다. 요구작전성능(일면 알오씨)을 군에서 만들었다. 이를 이행하겠다는 계약을 하고 개발 작업에 들어갔다. 결과는 지정된 기일 내에 개발 성공을 못하게 되었다. 알오씨가 좀 과했던 것이다. 방산을 미래 먹거리로 키우기 위하여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알오씨를 민간 주도로 개발하게 하고 점진적인 성능향상을 이루도록 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 성실한 실패는 귀중한 자산으로 취급하고 관리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세계 굴지의 방산 수입국이다. 방산품을 수입할 때 대한민국에게는 권한이 생긴다. 구매자 파워가 국제적 관행으로 형성되어 있다. 최신 전투기를 도입할 때 부품의 일부를 한국에서 만들겠다는 제의가 가능하다. 창 정비급 유지 보수도 대한민국 내에서 하겠다고 제안 할 수 있다. 라이선스 아래 조립을 하더라도 기술 축적이 이루어진다. 가량 비에 옷 젖듯이 어깨 넘어 보아온 기술이 언젠가는 대한민국의 것이 된다. 절충교역(일명 옵셑)으로 최첨단 부품들을 대한민국 내에서 조립 생산하게 한다. 조립 생산은 중소기업들이 맡는다. 선택과 집중을 하게 한다. 장기 확정계약으로 안정적으로 가동하게 한다. 이들이 앞으로 강소기업이 되도록 한다. 장소는 지방 소멸 지역 우선으로 배정한다. 젊은이들이 안정된 직장으로 출퇴근하게 된다. 국내 방산 시장은 대한민국 방산이 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방산 메이저는 시스템 통합에 집중하게 한다. 체계 연구와 관리, 후선 서비스에 주력하게 한다. 국방 방산품 제조 민간 업체 스스로 품질관리를 하게 한다. 부품 생산은 계열화하도록 한다. 전략 기획, 시스템 설계, 시스템 관리, 품질관리, 에이에스, 고객 관리 등 가치의 질과 크기가 방산 업체의 운명을 가르게 한다. 대한민국은 방산 선도국으로서의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내수, 지형, 기후, 인재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70년간 전투기 정비를 통해 전투기 설계 및 생산에 관한 기술을 익혔다. 획득한 각종 자원을 바탕으로 영혼이 있는 방산 산업정책이 필요하다. 방산은 시스템과 부품으로 구성 되었다. 부품은 기술과 원자재로 구분된다. 기술은 양질의 두뇌와 수학, 집념 등으로 구성된다.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기술이다. 모순을 기술로써 해결해 나가야 한다. 방산이 살 수 있는 길이다. 출산율 세계 최저인 대한민국, 방위산업 육성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다. 세계 4위의 방산 대국을 넘나 보게 된 데에는 선현들의 비전과 집념이 있었다. 고속도로, 철강, 전산망 등이다. 이제는 방산 철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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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역 청수역 그리고 정수조식(曺植)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字)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南冥)이며 아버지는 승문원판교 조언형(曺彦亨), 어머니는 인주(仁州)이씨이다. 字는 본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이며 관례 뒤에 본이름 대신으로 불렀다. 남명 조식(曺植)은 1558년 4월 11일부터 4월 26일까지 두류산 유람을 하고 《유두류록》을 남긴다. 1558년 4월 24일. 저녁에 정수역(旌樹驛)에 이르렀다. 역관 앞에는 정씨의 정문이 세워져 있었다. 정씨는 승선 조지서의 아내이며, 문충공 정몽주의 현손녀이고 승선은 의로운 사람이었다(夕到旌樹驛.館前竪有鄭氏旌門.鄭氏,趙承宣之瑞之妻.文忠公鄭夢周之玄孫.承宣,義人也). 부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성을 쌓는 죄수가 되어, 젖먹이 두 아이를 끌어안고 살면서도 등에 신주를 지고 다니면서 조석으로 제를 지내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으니 절개와 의리를 둘 다 이룬 것이 지금에도 이 정문에 남아 있다. 밤이 되어 우점으로 갔는데 겨우 말(斗)만한 크기의 방 하나뿐이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방에 들어갔지만 다리를 펼 수 없었고, 벽은 바람도 막아내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답답함을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으나, 잠시 후에는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서로 베고서 단잠이 들어 밤을 보냈다. 1558년 4월 25일. 역관에서 아침밥을 먹고 칠송정에 이르러 상고대에 올랐다가 다회탄을 건너서 일부 헤어지고 뒷날 이희안과도 이별을 했다. 조지서(趙之瑞)의 字는 백부(伯符), 號는 지족당(知足堂)·충헌(忠軒).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조찬(趙璨), 어머니는 생원 정삼의 딸이고 누이는 남명 조식(曺植)의 할머니이다. 호는 본명이나 자 이외에 쓰는 이름. 허물없이 쓰기 위하여 지은 이름이다. 《유두류록》에서 정수역(旌樹驛)이다. '기를 나무에 매단 역'이라 하여 역관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겠다. 남명이 정수역을 찾았을 때는 조지서가 갑자사화(1504년)로 죽임을 당한지 54년이 되고 역관 앞에 정씨 부인의 정문이 있다고 하니 정수역은 조지서 무덤 아래에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기를 달았을 추정되는 고목나무를 찾으면 역사 스토리는 명확해질 것이다. 《난중일기》 〈1597년 6월 1일. 비가 계속 내렸다. 일찍 출발하여 청수역(淸水驛) 시냇가 정자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였다. 저물녘 단성 땅과 진주 땅의 경계에 있는 박호원의 농사짓는 종의 집에 투숙하려는데, 주인이 반갑게 대하기는 하나 잠자는 방이 좋지 못하여 간신히 밤을 지냈다〉. 정수리 옥산서원 옆 시냇가에 이순신백의종군로 ‘청수역과 강정ㅡ쉼터’라는 비석을 세워 청수역을 재현하고 있다. 역관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옥이 쌓여 있으면 산이 빛을 머금는다(玉薀山含輝)’라는 玉山의 내옥샘에서 발원한 엷은 녹색의 물이라 청수역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조선 고종 을미년(1895)에 부사(府使)를 고쳐서 군수(郡守)라 하였다. 병오년(1906)에는 진주의 청암(靑岩)・대야천(大也川)・가서(加西)・종화(宗化)・정수(正水)・운곡(雲谷)・북평(北坪)의 7리를 하동에 내속시켰다. 1914년에 대야천면과 북면(北面)을 합하여 북천면으로 하고, 가서와 종화를 합하여 가종면(加宗面)으로 하였으며, 정수・운곡・북평을 합하여 옥동면(玉東面)으로 하였다. 곤양군이 폐군될 때에는 금양면과 서면이 하동에 내속되었다. 1929년에 가종면과 옥동면을 합하여 옥종면(玉宗面)으로 하였다. 《유두류록》에는 정수역(旌樹驛)이다. 旌樹驛의 旌(기 정)는 왕명을 받은 신하에게 신임의 표시로 주던 기이다. 헝겊이나 종이 따위에 글자나 그림, 색깔 따위를 넣어 어떤 뜻을 나타내거나 특정한 단체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樹(나무 수)는 木자와 尌(세울 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淸(청)은 氵과 靑이 합(合)하여 ‘맑다’를 뜻하고, 水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 모양을 본뜬 물을 뜻한다. 驛(역)은 ‘역참’이라는 뜻을 가진다. 역참(驛站)은 조선 시대에 있던 공공의 기별, 역마, 역원 등 여행 체계를 합쳐서 이르는 말이다. 대개 25리마다 1참을 두고 50리마다 1원을 두었다. 원(院)은 관원이 공무로 다닐 때에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고, 정수역에서 청수역로 되었다. 1906에는 정수리(正水里)로 표기되어 현재까지 불리고 있다. 正은 하나(一)밖에 없는 길에서 잠시 멈추어서(止) 살핀다를 합하여 ‘바르다’를 뜻한다. 마을의 역사를 찾는 것은 먼저 살아온 사람들이 어디서 살아왔는가를 살피고, 옛 길을 밝히는 것은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고 오늘의 지혜로 삼아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흔적이 없어지기 전에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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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예전 같지 않다.임란 때 가토기요마사(가등청정)에게 끌려간 필자의 당시 할아버지의 형님의 흔적을 찾아보려 일본에 갔다. 열도 남단 규수, 시마바라시 호국사(고코쿠지)와 구마모토시 본묘사(혼묘지)를 참배했다. 400여 년 전 조선 밖 외국에서 본국 부모님과 서신 교환한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 여대남 일요상인(上人)은 혼묘지의 3대 주지, 고코쿠지 창립 주지로 계셨다. 필체와 영정이 남아 있다. 출입국관리 절차가 9개월 전보다 한 단계 간소화 되었다. 출입국 심사에 소요되는 시간이 날로 짧아지고 있다. 출입국자의 패스포드 기재 내역, 출입국 당시의 사진. 좌우 엄지 지문 등이 데이터로 쌓이고 있다.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본인 여부를 신속, 정확하게 검증하고 있다. 교통망은 신경조직과 같다. 중추선, 간선, 지선 등으로 철로가 구분된다. 커넥션하는 지점에는 서로 연결 지점과 시점이 정교하게 짜여 있다. 이동하기 편하게 플랫폼을 선정한다 던지, 출발 시각을 알맞게 편성하였다. 다음으로 옮겨 타야 할 기차 표를 기차 안에서 차장을 통해 미리 예매할 수 있다. 캐스퍼 같은 미니 차가 눈에 많이 띈다.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약 80%가량이 소형차들이다. 제네시스 정도의 큰 차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방 소도시들 간의 연결 열차가 다닌다. 두 칸으로 연결하였다. 시골 마을버스 같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기차역이 있다.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이다. 역사 크기가 다섯 평 남짓하다. 주방장이 고안한 음식이 더러 나온다. 주방장이 스스로 창안한 것이다. 레시피는 공개 안 한다. 손님들은 새로 시도한 음식을 잘 받아 들린다. 창작 요리라고 추켜세운다. 입맛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이면서 재료의 양을 조절하거나, 새로운 쏘스를 개발해 창작 요리에 뿌려 낸다. 활어회는 보조 반찬이 거의 없다. 본질에 충실한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재래식 시장은 모든 불이 꺼진다. 손님이 안 오니 불을 켜 놓을 필요가 없다. 시장 상인들은 시장이 잘못 시정을 펼쳐서 이렇다고 한다. 식당들도 치열한 경쟁에 살아남은 몇 곳만 문을 열고 있다. 사찰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문화 센터화하다. 사찰이 민중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일본 고유의 국악이 사찰에서 공연된다. 사찰 경내에는 공동묘지가 묘지가 있다. 애완견 묘들이 많이 보인다. 애완견도 가족의 일원이라 여기고 있다. 사찰에 딸린 묘소는 가족당 한 평 가량 된다. 가까이서 보니 그렇게 좁아 보이지는 않는다. 가족이 죽어 화장한 골분을 이미 사망한 가족의 골분과 합쳐 놓는 경우도 많다. 관리비는 대한민국보다는 10분의 1정도이다. 한국말 교습하는 채널이 있다. 한류 붐 타고 퍼져나가는 말 중심으로 교습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치맥, 피맥(피자를 곁들인 맥주) 등이다.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말 배우는데 거부감은 없어 보인다. 놀이하듯 진행하고 있다. 규수 지방은 지진이 없지는 않다. 20-30년 만에 큰 지진이 온다. 지진은 언제나 올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평소 대비를 철저히 한다. 건물 외벽 관리도 철저하다. 부착물이 없다. 건물 주변도 깨끗하다. 인입 전선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혼묘지 입구 오래된 석등이 백여 미터의 길 양편으로 세워져 있다. 지진으로 이것이 모두 다 무너졌다. 다시 세웠다. 도보 양변도 깨끗하다. 특정 농산물을 특화한 가공 판매한다. 생강을 재배한 농가가 생강을 제품화 한다. 쨈, 소쓰 등으로 가공한다. 사탕도 만든다. 고부가가치화한다. 판매도 네트워크화되어 있다. 연관 조직과 공동으로 판매한다. 자신의 농산물을 특화 상품화하고 있다. 일본은 미래형 사회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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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만따뜻한 날씨가 현관문을 열게 만든다. 봄은 벌써 왔는데 시골집의 실내는 아직 겨울을 품고 산다. 밖이 더 맑고 따뜻하다. 마당에 나와 있는 시간이 훨씬 봄과 가깝다. 올해는 꽃과 나무를 심었던 텃밭에 여러 가지 채소를 심어보려고 한다. 겨울을 지나는 대파와 쪽파, 마늘과 상추를 보고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다.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텃밭 구석에서 화단 한쪽에서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잡초를 제거하고 흙을 고르는 중, 호미 끝이 돌에 닿는다. 돌을 들어내려고 여러 번 호미질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가 즐겨 쓰는 작은 삽을 가져와 여러 차례 흙을 파고 들어 올려 보았으나 쉽지 않았다. 더 큰 삽을 찾아 땅 깊이 넣어 지렛대처럼 돌을 들어 올려서 꺼냈다. 그 돌과 한 시간을 씨름한 것 같다. 꺼내 놓고 보니 들고 나올 수 없을 정도로 큰 돌이다. 아직도 밭 가운데 덩그러니 있다. 혼자 힘으로는 무리다 싶어서 그냥 두고 보기로 한다. 다음에라도 굴려서 나오든지 누가 오면 부탁하든지 해야겠다. 처음에 보았던 매끈하고 반듯하기만 하던 돌이 아래에 이렇게 큰 부분을 감추고 있을 줄 예상도 못했다. 적당히 넘어가도 될 것이었다면 처음 내 눈에 들어왔던 것만 믿고 끝날 일이었다. 사람의 관계라고 무엇이 다를까. 처음 보았던 그 사람의 단면을 기억하고 그것이 전부인 양 믿어버린다면 아래에 감추어진 많은 것을 알 수가 없다. 너무 많은 두려움을 감추고 있는 사람, 큰 상실을 해결하지 못한 채 꼭꼭 숨겨둔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닌 상처를 자신의 것인 양 품고 사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무너지기가 쉽다. 자신의 인생이 순탄하고 행복하다면 내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일전에 상담실 책임자가 상담실을 들어서며 하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상담과 거리가 멀어서 상담실이 어딘지도 몰랐네.’ 그때 내게 참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저분의 배우자도 자녀도 얼마나 힘이 들까. 자신의 생활에 아무런 불편함도 고민도 없다면 누군가는 희생하거나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 주변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왜 못할까. 상대가 내게 보여주는 것은 일부분일 경우가 더 많다. 보이지 않는 아래에 많은 어려움을 감추거나 잊어버리고 상대에게 길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격한 부모 슬하의 자녀들이 그렇고, 일방적인 배우자의 상대 배우자가 그렇고, 독선적인 상관의 부하직원들이 그렇다. 감추거나 잊어버리고 살아진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지금은 아닐지 모르지만 언제 어느 시점에 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불안과 우울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분노로 몸을 떨지도 모른다. 참고 지낸 시간이 길면 길수록 회복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길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조금만 귀 기울여 보면 알 수 있다. 몇 년째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젊은이가 있다는 소문을, 부모가 감당하기 힘든 청소년들이 있다는 사실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면 일방적이거나 독선적인 젊은 시절의 나를 만난다. 아이들과 배우자에게 지나치게 많은 걸 요구하거나 비난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부모님과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는 매사에 도덕적이고 지나치게 엄격한 편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올곧게 잘 자라 주었다. 그런 사실을 깨달은 이후부터 성인인 아이들이었지만 말없이 많이 안아주었던 것 같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지금은 자신의 전반적인 생활에 관하여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오늘, 당신의 자녀들이 매사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먼저 봄을 핑계 삼아 안부 전화라도 한 번 해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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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마을에서 죽전마을까지고하마을다목적회관 앞에 꾸불꾸불 흘러 (구)고하초등학교 옆을 지나 배다리공원 아래에서 주교천으로 합류되는 이름 없는 개천 앞에 섰다. 앞뒤로 산등성이 바람을 막아주고 물이 있으니 논이 있고 논에는 나락이 황금빛을 머금고 있다. 옛날부터 풍년이 들었고 사람들은 터를 잡고 살아온 것이다. 물넘이 보를 만들어 물이 고였다. 오리들이 헤엄을 치다가 머리를 물속에 넣었다가 빼 올리고 유연하게 목운동을 하고 있다. 물넘이 보는 소나기나 홍수에 물이 넘치고 평상시에 일정량 물이 흘러가게 홈을 장치하였다. 고인 물은 썩으니 살아있는 물이 되어야 물고기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의 지혜를 보는 듯하다. 어, 그것이 있어야 하는데! 자꾸만 허전하여 안내판 뒤로 돌아가 살핀다. 예상되는 그 자리에 손가락 길이의 두 가닥 금속 지지대가 있다. 그 사이에 솟대를 끼워 그것을 고정시켰던 흔적이다. 심증은 가는데 그것을 찾을 수 없으니 어디로 날아갔을까? 물넘이 보 위로 콘크리트 상판 양쪽에 허리높이 안전대를 고정시키는 기단에 파란색으로 건너 마을로 화살표 모양의 도형 안에 〈궁단로 Gungdan-ro 60-1→60-35〉를 인쇄하였다. 궁단로의 ‘로’는 路에서 따온 것이다. 궁단로는 한자에서 빌리어왔고 Gungdan-ro는 영문으로 옮긴 것이다. ‘궁단로’의 ‘궁’과 ‘단’은 어디에서 어디로 연결되는 것일까? 도로명은 부르기 좋고 시작과 끝을 알 수 있게 사용자의 입장에서 작명하면 좋겠는데, 화살표 방향은 곧장 뻗은 논길이다. 그렇다면 마을회관 앞 논길이라 해석해야 할까? 화살표 방향은 가르마처럼 곧은 산길이다. 대나무 평상에 앉아 누런 들판을 본다. 예전에는 참새를 쫓기 위한 최전방 초소였지만 이제는 추억의 장소이다. 가르마 속의 비밀 탐색은 다음으로 마루고 산 밑 동네 길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가자 고개 마루에 수백년 세월을 버티어 온 느티나무가 있다. 그 밑을 어제도 오늘도 사람들은 지난다. 어제는 긴 시간이고 오늘은 내일로 이어지는 시점이다. 나무 밑 정자에 앉아 둘러보니 교회가 있고 산에서 내려오던 할머니는 “교회에 왔나요?” 친절하게 물으시고 알밤 두 개를 손에 꼭 쥐어주신다. 커다란 물탱크와 느티나무 사이로 동네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이다. 열려진 대문에 전서체 필체의 건양다경(建陽多慶) 입춘대길(立春大吉)을 보고 신비로움에 젖어든다. 오른쪽은 듬성듬성 대나무가 자리를 차지한 뾰족한 봉우리이고 개가 짖으며 길손을 맞아주는 한낮이다. 마을회관 벽 앞에 안내판의 지붕에 세워진 솟대에 부리를 하늘로 향한 오리가 앉았고 지붕아래에 마을역사를 적었다. 〈고하리 죽전마을. 화살의 자료인 살대가 많이 났다는 남서방향으로 자리한 마을은 겨울은 따뜻한 양지이며 여름에는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 시원하고 아담한 마을이며 비옥한 농경지와 임야 하천을 끼는 한편 인근에 시장이 있어 생활필수품 구입이 편리하므로 예전부터 살기 좋은 마을이라 하였다. 마을 이름은 살대봉 밑에 있다하여 살대 밑이라 하였으며 왜정 시대에 죽전(竹田)이라 개칭하였다고 추측된다. 하동읍성 인근에 위치한 마을로서 폐성된 지 300여년이 지나도 이에 관련된 지명이 남아 감옥이 있었다는 옥(獄)뱀이 논과 관리들의 화살처였다는 사청(射廳), 향교의 유생들이 사용하였다는 향교샘, 모든 사람들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는 하마평(下馬坪)은 지금도 그 이름으로 남아있다. 특히 향교샘은 들 가운데 있어 겨울에는 지하에서 따뜻한 물이 솟아나 주민들의 귀염을 받았으나 하천 정비로 제방에 묻혀버렸다. 주민들의 인심은 풍부하고 마음은 넉넉하여 이웃 간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협심력이 강하여 왜정 말기에는 그들이 이름을 갱생(更生) 부락이라 하였으며 부자마을이라 하였다〉. 우측 아래는 하동 브랜드와 우측 상단에는 竹田이라는 인장을 볼 수 있다. 고하마을 안내판에 〈785년간 신다사촌, 한다사촌, 하동촌이며 읍기는 고하에 있었고 268년간은 성내에 있었다〉에서 성내(하동읍성)의 기록에 의하면 높이 3척이며 5백 88개소, 샘 5개소 등으로 복원을 수월하게 하고 있다. 죽전마을에서 〈감옥이 있었다는 옥(獄)뱀이 논, 화살처였다는 사청, 향교의 유생들이 사용하였다는 향교샘, 말에서 내려 걸었다는 하마평〉 등의 지명이 있다니 다행스럽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향교샘으로 향교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 된다. 향교터는 (구)고하초등학교가 이어왔는가! 오랜 기간 읍기였던 古河에 대한 유물 발굴을 서두르고 사진이라도 게시하면 고적지 탐방에 대한 동기유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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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골프가 의사보다 낫다바야흐로 파크골프 열풍이 불고 있다. 파크골프는 'Park(공원)'과 'Golf(골프)'의 합성어로, 1983년 일본 홋가이도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에는 2000년 진주 상락원에서 처음 6홀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파크골프의 규칙은 골프와 비슷하며 18홀에 1시간 정도 소요된다. 골프와는 달리 공을 굴리는 파크골프는 비거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근력과 체력이 많이 요구되지 않아 중장년층과 노년층, 특히 여성들이 많이 즐기고 있다. 또한 생활주변 가까운 곳에 있어 접근성이 좋은 생활스포츠로 파크골프인구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2023년 말 하동군 파크골프 인구는 800명을 넘어서고 있으며 진교, 고전, 횡천 파크골프장에는 매일 100여 명 이상의 동호인들이 파크골프를 즐기고 있다. 최근에는 많은 외지사람이 찾아와 군내 파크골프장 주변 식당가는 반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한동안 게이트볼이 유행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파크골프가 대세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파크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은 “파크골프채가 효자라며 의사보다 낫다”고 한다. 하동군에서도 진교 파크골프장을 36홀로 확장하고 있으며, 하동읍에도 옛 비행장 주변에 파크골프장 건설을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지자체에서 파크골프장을 많이 건설하는 것은 군민들의 건강과 행복 추구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지만, 대회 유치 등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잔디보호를 위해 3월 20일부터 4월 20일까지 휴장 소식이 전해지자 동호인들은 골프장 휴장으로 무료한 날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하면서도, 푸른 잔디밭에서 파크 골프를 즐길 수 있는 그곳으로 동호인들의 마음은 벌써 4월 20일을 향해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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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서 하나‘초등학교 앞에서 파란 불이 몇 번 들어왔는지도 몰라. 차들이 꼼짝도 못해.’ ‘3월의 하동이 그렇지 뭐.’ 전화를 한 상대는 차 안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내게 ‘꽃이 피기 시작한 계절, 그것도 주말에 움직인 건 너 잘못이지.’ 하는 것 같다. 토요일 오후, 하동도서관으로 가는 길이다. 평소 관심이 많던 나무 칼럼니스트인 고규홍작가의 강의가 있어 다리 건너 매화 축제는 생각도 못 했다. 봄나들이로 하동이 붐비는 날들은 대부분 피하고 살았는데 북천면으로 이사를 온 뒤 잠깐 잊고 살았나 보다. 길고 긴 행렬에서 빠져나와 골목에 주차하고 걸어서 도서관을 간다. 외장공사가 한창인 도서관은 입구까지 만차였고 반대편 도로엔 움직이지 못하는 차들로 처음도 끝도 보이지 않는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조금 시간을 여유 있게 온 것이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다. 결혼으로 하동사람이 되었지만 나는 하동의 자연을 사랑한다. 처음 하동에서 살기 시작한 시절부터, 명소라고 이름표를 달고 있는 곳이든 그렇지 못한 곳이든. 내 아이들의 고향이 하동이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돌아와 살고 싶은 곳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섬진강변을 놀이터 삼아 그 울창한 송림을 배경으로 자랐다. ‘내가 말이 많은 것이 아니라 나무들이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은 거예요.’ 약속한 강의 시간인 3시간도 모자라 선생님은 자꾸 나무를 핑계 대고 계신다. 강의가 끝난 뒤에도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궁금한 것들을 자꾸 묻기 시작한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나오니 아직도 도로는 차들로 가득하다. ‘요즘엔 하동송림이 휴식년제를 하지 않나요? 저는 전국을 다니면서 하동송림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리고 갑자기 솔방울이 많아진 이유에 대하여 듣고 더 놀랐다. 식물이 자신의 임종이 가까워지면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우거나 자손을 남기기 위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씀하시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쟁쟁하다. 우리가 가진 귀중한 것들의 가치를 모르고 사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 휴식년으로 하동송림은 많이 회복되고 더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준 것 같았는데. 어떻게 하면 대대손손 물려 줄 송림으로 지켜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가들이 나무를 심고 가꾸었던 사례들을 듣고 어느 이야기보다 감동적이었다. 특히, 우리 지역 평사리에 있는 ‘위민정 푸조나무’는 더 그랬다. ‘위민정이라는 정자는 어디 있나요?’ 강의 중 누군가 물었다. ‘정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나무 아래에서 쉴 수 있도록 나무에게 붙혀진 이름이예요. 다음에 평사리 가시면 꼭 찾아가 보세요. 주차장 좁은 골목길에 있어요. 보호수로 지정하고 팽나무라고 했지만 사실은 푸조나무랍니다.’ 그 말씀을 받아 ‘동네에선 그 나무를 할매나무라고 불러요. 위쪽에 있던 할배나무가 죽어버렸어요.’ 한다. ‘요즘도 당산제를 지낸 것 같아요. 금줄이 처져 있는 걸 보면…’ 최참판 댁만 열심히 들락거리면서 안부 인사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푸조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우리나라 최고의 물푸레나무를 찾아 개인 자격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까지 한 노력에는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선생님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한 번도 피지 않았던 꽃을 보여주었고 관리가 들어가 환경이 좋아진 이후론 해마다 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말 못하는 나무라고 우리가 함부로 할 수가 있는가. 귀 기울이면 들을 수 있는 그들의 언어를. 반가운 사람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악수를 하고 안아주듯이 나무를 만나면 인사를 건네고 안아주기로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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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제 심상찮다지난 4일간 남해안 벨트를 돌아보았다. 부산, 거제, 사천, 하동을 여행했다. 거제는 최고의 맛집이라 예외이지만, 대부분의 식당에는 손님이 없다. 식사 시간 내내 다른 팀은 볼 수가 없다. 부산에는 수조를 갖추고 활어를 파는 50여 개의 가게가 동시에 폐업을 했다. 입구는 전기를 껐다. 상치와 초장을 서비스하는 식당에도 한 팀 밖엔 없다. 문제의 심각성은 나날이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날씨는 꽃도 피고 화창해 지는데 경제는 심각성을 더해 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암울해 가는 경제의 시발점은 분양시장의 실종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건설 자재값 및 노임 상승으로 분양가 상승, 금리 인상 및 대출 규제로 인한 실 수요자들의 자금 동원력 미약, 부동산 값 상승 심리의 실종으로 투자 마인드는 극도로 하락한 상태다. 미분양 시장의 심각성은 증가 속도가 가파르다는 데에 있다. 3년 전 미분양 물량에 비해 3배 늘었다는 점이다. 완공한 아파트1 만 채가 분양을 기다리고 있다. 프로젝트 파이낸싱(일명 피 에프) 이 전년에는 전전년 대비 50%가량 늘었다. 부도율도 1% 포인트 이상 늘었다. 건설 경기가 얼어 붙었다. 대한민국의 경제 주름살은 아파트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나날이 경제 순환이 더욱 경직화 되어 간다. 지난 정권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대중인기영합주의(표퓰리즘)에 따라 경제를 운용해 왔다. 특히 부동산 정책에서 대중인기영합주의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고조에 이르렀다. 스무 여 차례에 걸친 부동산 정책이 발표되었다. 한 번도 국민의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는 경우는 없었다. 국민이 괴롭다고 엄살만 피워도 바로 완화시켜 주었다. 대중인기영합주의의 표상을 보는 듯하다. 저렴한 원전 전기 판매량 줄이고 비싼 태양광 전기를 팔게 하여 결국 한전은 국내 상장기업 중 최대의 부채 기업이 되었다. 200조가 넘는 부채를 안고 있다. 전 정권이 박은 대못 때문에 한전은 아직도 부채를 줄이지 못하고 있다. 장기 계약에 따라 비싼 신재생 에너지 전기를 사다가 싸게 팔고 있다. 대한민국의 공공부문 기관의 수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공공부문의 적자는 한전을 포함하여 1500조로서 1년간 총생산액의 73.5%나 된다. 공공부문의 부채는 매년 눈덩이 불어나듯이 늘어나고 있다. 대중인기영합주의의 표상이다. 3주째 계속되고 있는 의료 대란을 정부가 수습 못하는 이유가 있다. 과거 20여 년간 의료 대란에 대해 미봉책으로 마무리를 했었다. 지속발전가능성을 키워 나갔어야 했다. 지금은 버릇없는 부자 집 외아들이 되었다. 대한민국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몇 가지 개혁 과제를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매출을 일으키지 않고도 월급을 또박또박 받는 사람들을 줄어야 한다. 공무원의 수를 10년 이내에 50% 감축해야 한다. 공공부문 소속 준공무원도 마찬가지로 50% 감축해야 한다. 연금개혁을 완료해야 한다. 과거 박근혜 정부 때 공무원 연금 제도에 있어 절반의 성공을 완전한 성공으로 개혁을 완수해야 한다. 국민 연금도 더 내고, 덜 받고 또한 뒤에 받아야 한다. 냄비 속의 대한민국 의료 제도도 제대로 손봐야 한다. 건강보험도 연금 개혁과 같이하여야 한다. 경제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처하는 길 만이 살길이다. 국내 경제가 건실 해야 국제간 신용 거래도에서도 적격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정부는 경제 여건의 변화에 따라 전직을 할 수 밖에 없는 국민들에게 각별한 지원을 벌여야 한다. 전업 또는 전직 교육을 실효성 있게 펼쳐야 한다. 에이아이 앱을 카톡 다루듯이 하면서 미래 경제 환경으로 옮겨 탈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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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안내판에서 읽는 하동역사(Ⅳ)고하마을 안내판에 〈대가야 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785년간 신다사촌, 한다사촌, 하동촌으로, 읍기는 고하에 있었고 268년간은 성내에 있었으며 고하와 성내가 하동군의 읍기로서의 역할을 해오다〉에서 785년 동안 고을은 신다사촌, 한다사촌, 하동촌으로 불리며 중심지는 古河洞에 있었다. 268년은 하동현으로 읍기는 하동읍성에 존재했다. 《삼국사기》 하동군조에 “본래 한다사군이었였는데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하동’이라는 지명이 생기고 군현제 실시에 의거 하동군・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어떤 근거로 한다사촌, 하동촌이라 할까? 하동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여장이 5백 88개이고, 성안에 샘이 5개소…’기록되었다. 고하의 중심지역은 오늘날 어느 지점이며 기록물 및 고분 등에서 발굴된 많은 유물은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하동읍성에서는 비격진천뢰등 유물이 대량 발굴되었다. 하동은 대가야(42~562) 지배에 있었을까? 가야는 낙동강 동쪽 일부 지역을 포함하여 낙동강 하류와 남해안을 중심으로 지리산과 가야산 일대에 위치하여 동으로 신라, 서쪽은 백제이며 북으로 고구려에 접하고 있었다. 《삼국지위서동이전》에서 미리미동국(밀양), 고자미동국(고성), 반로국(고령), 악노국(악양), 안야국(함안), 군미국(곤양) 등의 기록을 볼 수 있고 각 지역에 성립한 가야소국의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비화가야(창녕)・아라가야(함안)・고령가야(함창)・대가야(고령)・성산가야(성주)・소가야(고성)・금관가야(김해)이다. 《일본서기》에는 탁순・탁기탄 등이 나오며 이를 전기가야연맹체라 부른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전기가야연맹은 532년 멸망하고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가야연맹체로 나타난다. 백제 근초고왕의 팽창정책으로 고국원왕이 전사하고 장수왕은 남진하여 개로왕을 죽인다.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밀어내고 백제는 한강유역, 신라는 한강 상류를 차지하였다. 백제가 주춤하자 신라는 한강우역을 차지하니 나제동맹은 파기된다. 대가야는 백제를 경계하여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신라의 동맹파기로 백제와 손을 잡는다. 백제 성왕은 태자 창을 앞세워 신라를 공격하고, 554년 옥천 관산성에서 백제・대가야・일본의 연합군과 신라는 국운을 건 대회전이 있었다. 성왕은 창을 격려하러 소수의 기마병을 이끌고 가다 삼년산성(보은)에서 출발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최후를 맞이했다. 성왕의 목을 벤 이는 삼년산군 출신의 고간도도이며 김유신 조부 각간 김무력의 비장이다. 연합군은 말한 필조차도 돌아가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삼국사기》에 관산성 전투에 성왕이 죽고 좌평 4명, 군사 29.600명이 죽였는데 일본군 1000명도 포함되었다. 561년 진흥왕은 대가야를 점령하기 위하여 부채 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인 비화가야(창녕)에서 지휘관회의를 한다. 대가야는 관산성전투에서 전력을 상실하여 저항 없이 562년 사다함 선봉의 이사부군에 멸망하고, 월광태자는 대가야 9대 군주 이뇌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라 고위 귀족 이찬 비조부의 여동생이자 비지배 딸이다. 그는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동맹으로 태어나 백제와 대가야의 외교관계가 정상으로 되자 신라로 망명하여 공을 세운다. 진흥왕은 점령지에 대가야군을 두어 월광을 도설지왕으로 옹립하고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대가야 지역을 완전 장악한 신라는 월광을 폐위시킨다. 그는 승려가 되어 합천 가야산 서쪽 5리 거덕사에 몸을 숨겼다가 야로현 북쪽 5리에 터를 마련하고 ‘월광사’를 건립했다. 가야산은 대가야 성지였고 월광은 이곳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말년을 보낸다. 古河마을은 낮은 산 밑에 형성되고 앞으로 고하 물줄기 흘러 골짜기에 논밭이 있다. 오랜 기간 읍기로서 협소하다는 관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배다리장터, 죽전마을, 성평리, 명교리 고인돌 공원을 둘러보면서 읍기가 자리할 입지적 여건을 갖춘 것으로 보게 된다. 읍기에 유물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연계되는 곳을 둘러볼 수 있는 역사 탐방로가 단장되어야겠다. 마을 유래 안내문은 그 땅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앞서 살았던 삶을 당시의 눈으로 보고 읽어 오늘의 지혜를 찾는 것이다. 마을 안내판의 내용을 연결해서 살피면 하동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노후한 것은 교체하고 내용을 살펴 수정하며 귀중한 사진을 첨부하는 것도 흥미유발을 촉진하며 타의 모범이 될 것이다. 하동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연결될 때 안내판은 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