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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안내판에서 읽는 하동역사(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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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을 안내판에서 읽는 하동역사(Ⅳ)

안명영(전 하동고 교장)

고하마을 안내판에 대가야 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785년간 신다사촌, 한다사촌, 하동촌으로, 읍기는 고하에 있었고 268년간은 성내에 있었으며 고하와 성내가 하동군의 읍기로서의 역할을 해오다에서 785년 동안 고을은 신다사촌, 한다사촌, 하동촌으로 불리며 중심지는 古河洞에 있었다. 268년은 하동현으로 읍기는 하동읍성에 존재했다. 삼국사기하동군조에 본래 한다사군이었였는데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다. 신라 경덕왕 16(757) ‘하동이라는 지명이 생기고 군현제 실시에 의거 하동군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어떤 근거로 한다사촌, 하동촌이라 할까?

하동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여장이 588개이고, 성안에 샘이 5개소기록되었다. 고하의 중심지역은 오늘날 어느 지점이며 기록물 및 고분 등에서 발굴된 많은 유물은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하동읍성에서는 비격진천뢰등 유물이 대량 발굴되었다.

하동은 대가야(42562) 지배에 있었을까? 가야는 낙동강 동쪽 일부 지역을 포함하여 낙동강 하류와 남해안을 중심으로 지리산과 가야산 일대에 위치하여 동으로 신라, 서쪽은 백제이며 북으로 고구려에 접하고 있었다. 삼국지위서동이전에서 미리미동국(밀양), 고자미동국(고성), 반로국(고령), 악노국(악양), 안야국(함안), 군미국(곤양) 등의 기록을 볼 수 있고 각 지역에 성립한 가야소국의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비화가야(창녕)아라가야(함안)고령가야(함창)대가야(고령)성산가야(성주)소가야(고성)금관가야(김해)이다. 일본서기에는 탁순탁기탄 등이 나오며 이를 전기가야연맹체라 부른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전기가야연맹은 532년 멸망하고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가야연맹체로 나타난다.

백제 근초고왕의 팽창정책으로 고국원왕이 전사하고 장수왕은 남진하여 개로왕을 죽인다.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밀어내고 백제는 한강유역, 신라는 한강 상류를 차지하였다. 백제가 주춤하자 신라는 한강우역을 차지하니 나제동맹은 파기된다.

대가야는 백제를 경계하여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신라의 동맹파기로 백제와 손을 잡는다. 백제 성왕은 태자 창을 앞세워 신라를 공격하고, 554년 옥천 관산성에서 백제대가야일본의 연합군과 신라는 국운을 건 대회전이 있었다. 성왕은 창을 격려하러 소수의 기마병을 이끌고 가다 삼년산성(보은)에서 출발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최후를 맞이했다. 성왕의 목을 벤 이는 삼년산군 출신의 고간도도이며 김유신 조부 각간 김무력의 비장이다. 연합군은 말한 필조차도 돌아가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삼국사기에 관산성 전투에 성왕이 죽고 좌평 4, 군사 29.600명이 죽였는데 일본군 1000명도 포함되었다.

561년 진흥왕은 대가야를 점령하기 위하여 부채 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인 비화가야(창녕)에서 지휘관회의를 한다. 대가야는 관산성전투에서 전력을 상실하여 저항 없이 562년 사다함 선봉의 이사부군에 멸망하고, 월광태자는 대가야 9대 군주 이뇌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라 고위 귀족 이찬 비조부의 여동생이자 비지배 딸이다. 그는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동맹으로 태어나 백제와 대가야의 외교관계가 정상으로 되자 신라로 망명하여 공을 세운다. 진흥왕은 점령지에 대가야군을 두어 월광을 도설지왕으로 옹립하고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대가야 지역을 완전 장악한 신라는 월광을 폐위시킨다. 그는 승려가 되어 합천 가야산 서쪽 5 거덕사에 몸을 숨겼다가 야로현 북쪽 5리에 터를 마련하고 ‘월광사를 건립했다가야산은 대가야 성지였고 월광은 이곳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말년을 보낸다.

古河마을은 낮은 산 밑에 형성되고 앞으로 고하 물줄기 흘러 골짜기에 논밭이 있다. 오랜 기간 읍기로서 협소하다는 관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배다리장터, 죽전마을, 성평리, 명교리 고인돌 공원을 둘러보면서 읍기가 자리할 입지적 여건을 갖춘 것으로 보게 된다. 읍기에 유물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연계되는 곳을 둘러볼 수 있는 역사 탐방로가 단장되어야겠다.

마을 유래 안내문은 그 땅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앞서 살았던 삶을 당시의 눈으로 보고 읽어 오늘의 지혜를 찾는 것이다. 마을 안내판의 내용을 연결해서 살피면 하동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노후한 것은 교체하고 내용을 살펴 수정하며 귀중한 사진을 첨부하는 것도 흥미유발을 촉진하며 타의 모범이 될 것이다. 하동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연결될 때 안내판은 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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