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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안전을 위한 슬기로운 오토바이 생활백서최근 도로를 보고 있으면 예전보다 다양한 오토바이가 눈에 들어온다.우리가 흔히 보는 이륜 오토바이부터 시작해서 보조바퀴를 단 삼발이,흔히 ATV라고 부르는 레저용 사륜오토바이, 뒤에 트럭처럼 수납공간을 가지고 있는 사륜오토바이. 신속한 기동력 등 다양한 장점을 가진오토바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안전 등 여러 위험이존재한다. 이런 오토바이를안전하게 타는 방법 3가지를 알아보자 첫 번째. 오토바이를 등록하고 책임보험을 가입하자. 대한민국의 모든 이륜·사륜 오토바이는 자동차 관리법에 의해 자동차로분류된다. 도로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자동차 관리법상 지자체에 등록하고 번호판을 부착하여야 하며, 자동차 손해 배상법에 의해 책임보험을가입하여야 한다. 이것은 대한민국 도로에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며 대한민국 모든 운전자의 의무사항이다. 여기서 핵심은 도로이다. 만약 농업용이나 레저용 사륜 오토바이의 경우 도로에 진입을 하지 않는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도로를 주행하기 위해서라면 위에 조건을 당연히 충족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를 알면서도 비용문제 혹은 무지로 인해 차량 등록과 보험가입을 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처벌은 절대 가볍지 않다. 미등록 오토바이 및 번호판 미 부착 도로주행의 경우 자동차 관리법상 과태료 사안으로 차량 미등록 시 100만원, 번호판 미 부착 시 50만 원이하로 규정되어 있다. 책임보험 미 가입의 경우 자동차손해배상법에 의해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1회 10만원 통고처분, 2회 상습법으로 형사 입건) 예를들어 오토바이를 미등록 상태에 번호판을 미부착하였으며 책임보험도가입하지 않은 상태로 경찰에게 단속되었다. 그럴 경우 최대 150만 원의과태료와 가볍게는 10만 원 통고처분 상습범일 경우 형사입건이 되는사안이다. 또한 법적 처벌 외에도 책임보험이 가입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교통사고발생 시 사고 보상금 문제로 인해 금전적인 어려움에 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둘째. 안전모 등 안전 장구의 착용이다. 교통부서의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보면 다양한 교통사고를 마주하게 된다. 올해 하동군의 경우 교통 사망사고 발생 건수 중 2건이 오토바이 사고였으며 2건 모두 안전모를 착용했을 경우 운전자의 생명을 구할 수있었던 사고였다. 오토바이 교통사고 사망 원인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부상 부위가 머리쪽으로 전체 교통사고의 3분의 2가 넘는다고한다. 안전모 착용의 중요성은 100번을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사고는 나의잘못뿐 아니라 타인의 잘못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누구나 당할 수 있다는말이다. 오토바이 이용 시 안전모 등 안전 장구를 적극 착용토록 하자. 셋째. 신호 등 교통법규를 잘 지키자. 통계에 의하면 신호위반으로 인한오토바이 운전자의 사망률은 다른 차종에 비해 1.8배나 높다. 또한 법규위반으로 인해 교통사고 발생 시 보험을 가입하였더라도 형사처벌의대상이 된다. 최근 오토바이 법규위반을 단속하기 위해 공익제보단을출범하였으며 후면식 무인단속장비도 개발하여 운영 중이다. 하지만 이런 법적 규제보다 무엇보다 오토바이 운전자의 준법정신 함양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도로교통법은 오토바이에 관해 면책의무를 주지 않았다. 도로 위 일반차량과 똑같은 법규가 적용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이 있다. 일이 크게 벌어지기전에 해결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을 가만 두었다가 큰 손해를 보게되는 경우를 말한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 없다. 하지만 오토바이를타면서 위 3가지를 꼭 지킨다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을 일을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잊지 말고 위 3가지를 꼭 지켜 안전하고 즐거운오토바이 생활을 즐기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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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다아버지라는 말은 누군가에겐 성스런 이름이요, 웃어른으로 아들이나 딸을 가진 남자이다. 고난의 시대 일제 강점기에 메마른 땅 시골에서 6남매를 키워주신 나의 부모님의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꿈이 무엇인지도 모르시고, 열심히 농사 지으며 오직 가족 먹여 살리기에 혼신을 다하신 부모님! 그 분들의 희생 위에 꽃 핀 희망인 우리 6남매-각자 주어진 삶을 살면서도 부모님 제삿날에는 함께 모여 부모님을 추억하며 감사 올렸고, 부모님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자고 다짐했었다. 이런 6남매들도 어느새 자식 가진 부모가 되었다. 나는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 속에서 자랐고, 운 좋게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교사로 재직 중 결혼하였으며 곧이어 장남을 낳으면서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2남 1녀의 아버지다. 준비 안 된 아버지이지만 건강하고 예쁜 아이를 보면 괜히 신났고, 같이 놀면서 재롱을 더해 웃음 있는 행복 속을 거닐었다. 장남이 초등학교 입학 전에 밖에서 놀다 집에 오는데 한쪽 다리를 절어 깜짝 놀랐었다. 무혈성괴사'라는 병이었다. 북천에서 진주까지 먼 길 달려 정형외과병원에 입원하니 하반신을 깁스해 주었다. 6개월이 지나도 낫지 않아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했고, 다시 1년 후 서울 한국병원에서 수술로 완치했다. 자식이 병나면 슬퍼하기 전에 슬기롭게 대처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고, 그 뒤 장남의 고3때 교육방송을 밤 12시까지 들으며 같이 공부했던 게 효과가 있었던지 의과대학에 입학하는 행운도 얻었다. 차남과 장녀도 대학을 졸업했고, 지금은 결혼하여 그들도 부모가 되었다. 자식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훌륭하게 자라길 바라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산 지 5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은 좀 더 잘 키웠더라면 하고 후회한다. 요즈음은 자식들이 나보다 나를 더 걱정해 주는 게 싫지 않지만 아버지 로서의 체통을 지켜가며 인생의 지혜와 삶의 가치를 가르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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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아이 시대 세상 바뀌는 모습요즈음 인구에 회자 되고 있는 에이아이(AI) 대표 앱이 챗지피티다. 챗지피티에게 물었다. AI가 답한 내용에 대해 진실성 및 가치판단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질문했다. 답이 돌아 왔다. ‘저는 오픈 AI의 지피티-3 모델로 작성된 인공지능입니다. 따라서 제 답변은 주어진 데이터와 (이미 받은)훈련에 기반하여 (답변이)생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제 답은 인공지능이 아닌, 사람의 가치 판단과 경험에 근간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질문하신 내용에 대한 진실성이나 가치판단은 귀하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어야 합니다. AI는 (답변에)오류가 발생할 수 있으며, 정보의 정확성이나 품질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 답변은 참고용으로만 사용되어야 하며, 실제 상황에서는 전문가의 조언이나 검증된 정보를 참고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AI시대일수록 자신은 주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스스로 갖춰야 한다. 챗지피티는 언어를 해석하는 모델을 내장하고 있다. 이 모델은 다음 단어가 무엇이 나올 것인지를 훈련 받은 경험치로 알고 있다. 앞 단어와 다음 단어 간의 연관성을 알게 한다. 조 단위의 경험치를 가지고 있다. 단어는 그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백타값으로 표현한다. 한 문장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한 문장을 벡타값의 집합으로 표현한다. 그 문장이 지닌 의미는 벡타값의 집합체로 표현된다. 질문에 대한 답변의 문장도 위와 마찬가지다. 부정확한 답변이 종종 발생한다는 것을 전제로 AI를 활용해야 한다. 나를 아는 능력이 요구된다. 다양한 시각을 소유하기 위한 균형 감각력 제고, 남다른 모든 분야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그리고 제너럴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질문력이 높아야 한다. 지식의 구조화(뉴욕 모던 아트 박물관에 제시됨)를 이해하게 되면 다양한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 나쁜 질문이란 없다. 단지 질문이 없다는 것은 바보들의 선택지이다.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독서를 통한 상상력 배양이 필요하다. 상상한 것을 스케치 해보면 더욱 의미 있는 상상력으로 돌아 올 것이다. 영어를 통번역해주는 앱이 나왔다. 앱에 한국말을 하면 그대로 영어로 소리가 나온다. 물론 영어로 말하면 반대로 한국어 소리가 나온다. 이 정도 수준이 되었으니, 영어를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럼에도 영어는 학습해야 한다. 입 속에서 한국어로 말하면 앞 이에 붙어 있는 스피커에서 영어로 소리가 나는 기계가 나올지라도 영어는 스스로 학습해야 한다. 좋은 재능을 왜 썩히는가? 영어를 익히는데 실패한 사람들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영어를 익히는데 잘못된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AI의 도움으로 효과적인 영어 학습을 할 수 있다. 자신의 가치와 감정을 상대편에게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기계음에 의한 자신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의사소통하려는 상대와 눈빛,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면서 감정과 목소리 톤을 조절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가는 묘미를 기계에게 맞길 순 없다. 수년 이내, 핸드폰 보급이 보편화 되었을 때, 수능 시험 치룰 때 핸드폰을 이용하여 언어 과목 시험을 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AI를 활용하는 상태에서 AI의 활용 능력, 가치 등을 평가하는 능력을 측정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이 우주에서 유일한 고유성을 가진 인격체임을 인식하는 것.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 AI시대에 AI를 잘 활용하여 삶의 의미를 힘차게 구현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는 것. 포기란 없다는 것. 잘 안되는 것은 AI에게 물어 보거나 방법을 달리해 본다는 것. 이웃에 대한 따뜻한 마음으로 기부(donation) 및 봉사를 하는 것. 자신의 건강을 살피면서 주경야독하는 것 등이 요구된다. AI시대에 살아 남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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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처럼 혹은 이불 같은시골의 아침은 담백하다. 아직은 시월인데 ‘춥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참아본다. 세월의 흐름에, 계절의 변화에 너무 빨리 반응하는 게 싫다. 지나간 것에게 인사를 건네고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해 둘 시간이 필요하다. 시골로 이사를 하고 집이 좁다는 이유로 손님이 내집에서 자고 가는 일이 흔하지 않다. 부모나 형제들이 가까이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로 불편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도 주말에나 겨우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그 시간이 소중하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 핑계를 대자면 불편한 시골집에서 자고 가라는 소리를 선뜻 할 수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이번 주말에는 내게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가족과 갈등이 있어 집에 들어가기는 싫고, 숙박 시설을 찾아가는 것도 서글퍼서 고민하던 중 내가 생각났단다. 나는 이것저것 따질 새도 없이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좁든 말든, 정리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내집을 생각해 낸 그녀가 고마웠다. 아이가 사용하는 방을 정리하고 이불을 바꾸고 향초를 피운다. 갑자기 부산해진 내가 우습기도 하다. 그래, 이렇게 누군가 내집에 와서 하룻밤 머물고 가면 되겠구나 싶다. 침대 머리맡에 탁자를 넣어두어 그녀의 짐을 풀게 하리라. 마음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빌면서… 누구나 살면서 겪게 되는 갈등이 있지만 같은 문제로 계속 겪어야 한다면 힘든 일이다. 수십 년을 살아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우리 세대들에게는 일관되게 부모라는 배경이 있다. 절대로 집을 나와서는 안 되고, 헤어져서도 안 되는 부모님의 말씀이 가로 막고 있다. 그에 비하면 나의 어머니는 일찍 열린 사고를 하셨나보다. ‘살다가 개선의 여지가 없으면 언제든지 돌아오너라. 문은 언제나 열어두겠다.’ 하셨다. 그런 이유였을까. 나는 내 인생을 주도적이고 살았고 크게 후회도 없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전기매트를 깔았다. 장판으로 기능하던 것에다 코드를 연결하고 온도를 높인다. 맨바닥으로 있는 동안은 크게 따뜻하지 않지만 그 위에 얇은 이불 하나를 펼쳐 놓았더니 온기가 달아나지 않고 제법 따뜻하다. 후배가 다녀간 방을 정리한다. 내집에서 지낸 하루가 그녀에게 따뜻함으로 남았으면 싶다. 시린 등 토닥이며 얇은 이불이라도 되어 주었을까 궁금해진다. 손님처럼 후다닥 다녀갔지만 마음 한쪽에 웃음이 있는 작은 기억하나 만들어 갔으면 싶다. 아침에 일어나 둑길을 걸으며 나누던 이야기, 비스듬히 소파에 기대어 잠시 모든 거 잊고 기분 좋게 깔깔거리던 목소리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용감하게 자신의 인생을 위해 도전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녀를 옭아매고 있는 세상의 모든 시선들을 걷어내고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눈으로 집중했으면 좋겠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가을 아침이다. 마당에 나가 이 꽃 저 꽃에게 인사를 건네며 신기해 하던 그녀의 모습이 마당에 가을 기운과 함께 되살아난다.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남은 인생이 채워지기를 빌어본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다. 그 역할에 충실하다가 막이 내릴 때쯤에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 무대를 내려가야 하리라. 아직도 내 화단에 보랏빛 도라지꽃은 상냥하고 알프스 민들레는 몸을 낮추어 가족을 늘리는 중이다. 내아이가 도라지꽃을 가리키며 묻는다. ‘엄마, 이건 나팔꽃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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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별서(Ⅱ)“조항연입니다. 저의 집 모든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라고 의욕을 보인다. 대문 밖이나 집안에 들어서면 품위를 높이고 집안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우선적으로 방지(方池)를 원형 복구하였단다. 方池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우주관을 보여 주는 연못이다. 가운데 둥근 섬은 하늘이고 사각형은 땅을 나타내며 섬에서 피어난 꽃은 자연의 조화이며 물은 생명이다. 육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우주의 형체를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는 장점 때문에 서양천문학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천원지방(天圓地方)은 고대 우주관의 주류로 자리매김해왔다. 앞에는 七星峰이 펼쳐지고 뒤로는 형제봉이 빙 둘렀고 바람과 구름이 만나는 이곳은 내륙과 이어지는 회남재가 있다. 솔방울 닮은 볼록 솟은 솔봉(峰) 아래 남으로 단계별 건물을 이어나갔다.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행랑채는 남아있고 사랑채, 대문채 겸 바같 행랑채, 연정(淵亭), 곡간, 별당, 사당 등은 소실되었는데 제 모습을 갖추면 솔잎 향이 멀리멀리 펴져 그 향기에 봉황이 날아올 듯하여라! 方池를 내려다보며 우주를 논하고 꽃을 감상하던 淵亭 터와 병풍 역할로 동백을 심어 안채를 살짝 가렸던 사랑채 터 사이 계단을 올라가면 안채이다. 용마루의 적새는 암기와를 엎어 여러 겹 포개 무게중심을 집중시켜 안정감을 주고 있다. ㄱ형 지붕은 양쪽 지붕의 빗물을 모아 떨어지게 하고 있다. 각 지붕의 빗물을 공동 처마 끝으로 모으기 위하여 지붕골은 비스듬한 구조이다. 빗물은 처마 끝 홈에서 받고 두 개의 홈을 연결하는 덮개는 수키와로 모양을 내고 있다. ㄱ형 지붕의 특성을 이용한 공간 활용의 본보기가 되고 있단다. 정면은 八자형 지붕으로 용마루 바로 아래는 사각형이다. 측면 용마루 밑 벽은 삼각형이며 하단은 부채꼴 모양이다. 도리는 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로 작은집은 3개 큰집은 5개의 도리가 들어간다. 화사별서는 7개 도리로 구성되어 희귀한 구조이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역사성과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마당 처마 아래 2뻠 정도 홈을 판 석조가 있고 옆에 아래를 둥글게 다듬은 한길 정도 나무 막대가 있다. 아래를 석조 홈에 끼우고 위에 호롱불을 얹어 야간작업이 가능하게 하는 조명 받침대이다. 목재는 쪄서 사용하였는데 수분 증발은 물론 살균되며 송진이 골고루 퍼져 내구성이 강하다. 분야 최고 장인들의 솜씨와 엄격한 감독으로 건축되어 지금까지 한 번도 지붕을 수리하지 않았고 내놓으라는 기술자도 혀를 내두른단다. 기둥은 주춧돌이 높게 받쳐 비바람이나 지열을 피할 수 있는 구조이다. 내측(內廁)은 냄새가 나지 않고 퇴비로 전환되게 왕겨를 사용하였다. 뒷 돌담은 비탈을 절개하여 돌을 마름모로 다듬어 대각선을 아래로 쌓아 안정감을 준다. 담장 끼리 접촉 부위는 높이가 다른 직사각형 돌을 수평으로 어긋나게 쌓아 하중을 분산시키고 있다. 넓은 후원에는 별당과 사당이 있었다. 행랑채 뒤로 담을 따라 내려가다 개울너머에 배가 물에 들어가려는 모형의 바위가 있다. 다듬고 섬세함과 우아함이 풍기는 필체로 화사별서(花史別墅) 융희기원후제일회신유중추상완서(隆熙紀元后第一回辛酉仲秋上浣書)라 새겼다. 1921년 8월 상순 화사별서 재건과 화사의 회갑을 기념하는 것이다. 화사(花史)는 조선 개국공신이며 영의정을 지낸 조준(趙浚)의 직계손 조재희(趙載禧, 1861~1941)의 호이다. 별서(別墅)는 농사를 목적으로 지은 별장이다. 살던 가옥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두고 있으나 화사별서는 명당에 명당을 찾아 본가에서 천리 길이나 떨어져 있다. 본집은 경성부 당주동(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근처)에 있었고 지금의 대문은 솔봉 아래에 북문을 옮겼다. 한양으로 출입은 회남재를 넘어야 하기에 북문이 필요했던 것이다. 화사별서는 경남유형문화재이며 〈조부자집〉으로 알려졌다. 박경리 소설 《토지》 배경이 된 최참판댁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조항연씨는 차분하게 ‘서희’를 불러오는 별당을 복원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양현은 별당으로 뛰어들었다. 서희는 하얀 모시 치마 저고리를 입고 푸른 해당화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이, 일본이 항복을 했다 합니다!” “뭐라 했느냐?” “일본이, 일본이 말예요. 항복을, 천황이 방송을 했다 합니다.”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이냐!”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토지 제5부 7장 빛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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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별서(Ⅰ)악양 상신마을로 길을 잡았다. 머리가 지면에 닿을 듯 걷다가 무언가에 끌려 고개를 드니 5개 장승이 버티고 섰다. 뒤쪽으로 사모관대를 쓰고 위아래 이빨 사이에 주먹 하나 들어갈 정도로 웃고 있는 신랑은 긴장이 역력하다. 족두리 쓰고 긴 비녀를 꽂은 신부 역시 이빨이 보일 정도로 웃지만 표정 관리를 하는 듯하다. 앞줄 가운데 입술은 앙다물고 눈을 아래로 깔고 의기양양한 매파의 모습이고, 좌우에는 주먹코에 왕방울 눈으로 주위를 살피면서도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여유를 보이는 길잡이 장정들이다. 정자나무 앞 자연석에 ‘상신마을’ 그리고 기단에 ‘정겹고 풍요로운 고장’을 새겼고 뒤에는 이름을 기다리는 정자가 있다. 전봇대에 ‘하동천문대’라는 이정표가 걸렸다. 매연이 없고 하늘이 맑아 하늘의 별과 반딧불도 불 수 있는 청정지역임을 알게 한다. 동네가 나온다. 우로는 온통 감나무 밭이다. 가지가 땅에 닿게 하는 대봉감을 수확하는 손길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마당의 감은 대처로 나가 있는 아들딸에게 나누어 주기 위하여 순위에서 밀렸는지 집은 조용하다. 턱을 땅에 깔고 잠이 들었던 개가 ‘컹컹’ 소리 내며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집에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파란색 대문 기둥에 도로명 주소 안내판을 내걸고 옆에 빨간 지붕의 우체통이 있고 그 아래 화이트보드에 주인의 캐리커처와 성명을 적었다. 남자는 넥타이를 매고 머리는 2:8로 넘겼고 여자는 파마 스타일이다. 신기하고 친밀감이 간다. 하나의 사물에 문자로서 표현은 지역마다 나라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림은 간단하면서 공통의 표현이다. 이처럼 독창적으로 주인을 알리는 마을을 어디서 보겠는가. 뒤따라오던 젊은이가 지나가는지라 우체통을 가리키면서 “마을에 특색이 많군요?”“녜, 잘 오셨습니다. 볼거리가 많답니다!” 간단명료하면서 얼굴과 말에서 위엄과 기품이 넘친다. 젊은이는 빨갛고 감색 배낭을 메고 검은색 반팔 티에 검은 바지를 입었는데 걸음걸이는 빠르면서 안정되었다. ‘까장내 170m’ 이정표! 귀에 익고 어색하지 않았을 ‘까장내’를 되새이면서 길 건너 안내판에 긴장된다. 〈상신마을 문화 탐방로. 상신 마을은 악양면사무소에서 1km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으로 부계마을, 서로 주암마을, 남으로 정서마을과 정동마을, 북으로 노전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정서마을의 위쪽 지역에 잘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새터몰(上新)’로 불린다. 정서리는 악양의 중심지이며 하동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된 마을이다. BC 5000년 금석병용 시대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고, 삼한시대 변한 때 악양을 중심으로 일어난 낙노국(樂奴國)의 심장이었다. 1633년에는 상촌, 성지촌(城祉村) 혹은 성후촌(城後村)으로 불렸다. 1914년 행정개편 때 원정서(原亭西), 상신, 주암(周庵), 성덕(城德)을 합쳐 정서리(亭西里)로 되었고 지금은 상신과 정서로 구성되었다. 대표적 문화유적은 화사별서(조씨고가)와 동곡재가 있고 의병대장 임봉구의 기록이 전해진다〉. 亭西里의 정서(亭西)는 어디에 있던 정자(亭子)의 서쪽에 있는 지명일까? 왼쪽으로 논이고 마을길을 조금 오르자 활짝 열려진 대문 앞이다. 동쪽으로 방위를 잡은 대문은 짐을 가득 실은 수레가 들락날락할 수 있겠다. 대문 안벽에 위로부터 정동상신길 73-13, 파란색 우체통 아래 화이트보드에 집을 그렸고 상단에는 ‘조한승’이다. 솔방울 모양의 봉우리를 배경으로 계단식 담장 안에 ㄱ형 안채와 ㅡ자형 행랑채가 있다. 안채의 정면은 八자형 지붕이고 옆면은 높다란 용마루 아래는 삼각형이다. 담장 아래 넓은 공터는 사랑채 터이고 소나무 5그루를 그렸고 축담 아래는 거대한 바위가 놓였다. 대문을 지나 담벽 밑에 세워진 안내판을 볼 수 있다, 〈조씨고가(趙氏古家). 조선 개국공신 조준(趙浚, 1346-1405, 본 평양)의 직계 손 조재희가 낙향하여 지었다. 16년 걸려 건축되었고 조부자집으로 알려져 있다. 동학혁명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랑채와 남자 행랑채, 후원에 별당, 사당 등이 불타고 안채와 방지(方池)만이 남아 옛 영화의 아쉬움을 더하게 한다. 이집은 박경리 장편소설 토지의 최참판댁 실제 모델이 되었다〉. 담 밑에 두 길 넘게 비스듬히 땅을 파고 안쪽으로 다듬어진 돌을 쌓고 한 사람 다니게 여유를 두고 물을 담았다. 연못 가운데에 원형으로 섬을 조성하고 가운데 백일홍이 만발하였다. 왜 사각형 연못이며 원형 섬일까? 내려다보며 이리저리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마침내 여기까지 오셨군요!”길에서 만났던 그 젊은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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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엑스포 기회를 얻으려면삼십 년 전에는 대한민국이 넛 크래커에 끼인 잣 같다고 했다. 아이엠에프 시절 대한민국을 바라보던 시각이었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 중국의 추격하는 기술과 제조능력 때문에 한국의 미래 위상이 걱정된다는 의미였다. 대한민국은 아이엠에프를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구조조정에 성공한 것이다. 미래지향적이지 않은 것, 지속발전가능하지 않은 것들과 과감하게 결별했다. 전세계가 미래 먹거리로 여기고 있는 것들에 대한민국은 모두다 선전하고 있다. 원전, 2차 전지, 자동차(엔진, 전기, 무인), 반도체, 인공지능, 로봇 등에서 세계를 리드하고 있다. 중화학 시대를 넘어 미래 기술 중심 제조 국으로 거듭나고 있다. 2030 부산 엑스포 유치는 대한민국에게는 시의적절하다. 새로운 산업혁명 즉, 인공지능 로봇에 의한 보다 나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중이다. 부산 엑스포에서는 미래 세계 비전을 전 세계인과 공유하는 마당이 될 것이다. 엑스포 기회는 거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계 가장 부유한 사우디와 숙명적인 경쟁을 해야 한다. 황금의 나라와 경쟁해서 이겨내야 한다. 대한민국이 돈으로 경쟁해서 이길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산업 혁명의 시대임을 알린 런던 엑스포, 모든 제조 시설에는 전동 모터와 콘베어 벨트가 있었다. 유리가 귀한 시절, 높고 넓은 건물을 전부 유리로 감싸 지었다. 파리 엑스포는 에펠 탑으로 유명하다. 엑스포가 끝나면 헐리기로 하고 짓기 시작했다. 튼튼한 기초(인프라)가 있으면 그 기초를 이용하여 지렛대를 설치하여 더 높은 곳으로 철골을 세울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와 개념으로 에펠 탑을 짧은 시간 안에 건설하였다. 처음에는 너무나 흉물스러웠다. 지금은 세계적인 랜드마크가 되었다. 다음에는 대한제국이 엑스포에 참가했다. 미국 시카고 엑스포였다. 갑옷(고종 황제의 것으로 추정), 갓 등 민속 용품들이 출품되었다. 그 출품들은 기증되었고 현재에는 시카고 박물관에 전시중에 있다. 60년대에 미국의 세계적 경제 대국 임을 과시하는 뉴욕 엑스포가 열렸다. 굉장한 크기(이십 층 높이쯤)의 지구본이 설치 되었다. 이 지구본은 랜드마크가 되지 못하고 50년 후쯤 철거되고 말았다. 부산 엑스포는 산업발전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전환기 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천혜의 기회이다. 공해 없는, 3디 작업 없는, 진동과 소리 없는, 운전자 없는 새로운 산업 사회의 모습을 보여 준다. 대한민국이 체득한 지혜와 성과를 전세계를 향해 알린다. 이것이 유치 경쟁국들을 따돌릴 수 있는 지혜일 것이다. 참가에 편의를 준다는 등은 초등학교 반장 선거전을 연상케 한다. 지구촌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이 계기를 어떻게 지구촌에 제공하겠다는 웅장한 비전을 보여 주어야 한다. 대한민국과 전 세계가 부산 엑스포를 계기로 손을 잡고 나가면, 인공지능과 로봇 사회에서 새롭게 얻어진 아이디어로 상호 발전해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로 마케팅 해야 한다. 부산 엑스포를 계기로 대한민국은 지구촌을 풍요롭게 리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질적 풍요를 딛고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갈등을 해결하여 지구촌 전체가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비전을 보여 주어야 한다. 참가국 개별 국가들이 부산 엑스포에서 어떠한 변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인지를 직접 체득할 수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설득전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제안하는 부산 엑스포 지지국을 위한 제안으로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세계인과 공유하고자 한다는 메시지를 포함한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인공지능과 로봇 사회를 선도, 기후변화 대처, 국가간 갈등을 해결, 질병 예방, 교육 및 과학기술의 공유(전기 및 수소 차, 무인 자동차 등),인력의 국제간 교류 촉진, 생산 기술의 이전(한국판 카이스트 설립 지원) 등을 포함시킨다. 세부적인 지원으로는 참가국 부스 시설 등의 설치 지원, 참가국의 날 행사 안전 요원, 안내 요원, 행사진행 요원 지원 등이다. 참가국 출품은 양도 받아 엑스포 박물관에 전시, 100년 후 후손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엑스포 개최국만 이득을 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개최 희망 국이 엑스포의 이상을 몸소 실천하겠다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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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너 올라오면 보여 줄 사람이 있어.’ 몇 달 전부터 친구는 내게 이야기 하였다. 파크골프를 하면서 만난 인연인데 자꾸 마음이 쓰이는 사람이라며 내게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아직도 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친구는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운동을 한다. 파크골프는 혼자서 할 수 없어 매번 멤버들이 필요하고, 그 역할을 하다 보니 클럽을 만들고 클럽장을 하고 있다. 한 번 시작하면 제대로 하는 성격이라 대회에도 나가고 신입회원들을 지도하는 감독 역할도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추석을 지낸 주말 나는 가을 기차를 탔다. ‘너도 금방 그 사람을 알아 볼 수 있을 거야.’ 기차표 예매를 하는 사이사이로 그 인연의 이야기가 끼어들었다. 파크골프를 시작한 후부터 친구들과의 모임은 여행지의 파크골프장이 되었다. 이번 여행은 후배 두 명과 함께였다. 아직도 일을 하고 있는 나는 주말에 겨우 한 번 갈까 말까하여 실력은 입문한 상태 그대로이다. 그렇게 하는 운동인데도 시작하면 재미있고 즐겁다. 복식 게임이라도 할라치면 짧은 실력으로 파트너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올 가을 여행지는 양양과 화천의 파크골프장이었다. 유감스럽게 양양 골프장을 찾은 날은 비가 와서 물에 빠진 채로 잔디밭을 걸었다. 조금 성가시긴 했지만 돌아와 생각하니 짙은 향기 베어나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화천에서 1박을 하고 화천 파크골프장을 찾았다. 이외수 선생님 문하에서 잠깐 공부한 적이 있던 나는 화천이 항상 그리운 동네였다. 너무 멀어서 자주 갈 수 없었던 곳, 좋은 문우들과 밤새워 나누던 이야기, 그곳의 풍경들이 가끔 떠올랐었다. 친구의 그 인연은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중년의 나이에도 순박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힘들고 길었던 긴 터널을 겨우 빠져나와 스스로 살겠다고 찾은 파크골프장에서 내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그 사람을 단번에 알아본 친구도, 내미는 손을 덥석 잡은 그녀도 예사롭지 않은 사람들 같았다. 내게 그 인연을 이야기 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내 이야기도 했던 모양인지 우리는 부연 설명 없이도 금방 서로 친숙하게 지내게 되었다. 사람을 만나고 또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기까지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 듯하다. 오랜 시간의 갈피마다 함께 지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인연들도 있고, 어느 날 문득 바람처럼 다가왔지만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는 인연도 있다. 오다가다 스치는 많은 인연들도 전생의 어느 골목길에서 잠깐이라도 서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얼마 전 접한 소설들이 전생을 이야기한 것들이 제법 있었다. 전생의 가족을 못잊어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었고, 너무 끔찍한 기억으로 어린 아이가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었다. 소설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처음 가는 곳인데도 익숙한 장소나,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알고 있는 사람 같은 느낌은 나 혼자만의 경험은 아니리라 믿는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내 전생에 온 적이 있었나보다.’ 라고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하기도 한다. 갑자기 나타나 서로에게 아릿한 기쁨이 된 친구의 인연을 응원하고 싶다. 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그 마음으로 오랫동안 함께 하기를 바라고 싶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서로의 지나온 시간들을 가볍게 열어 보이는 그 날이 오리라 믿으며 가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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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창 유성준・이선유 기념관도로변 쇠기둥에 달린 ‘판소리 기념관’을 보고 길을 잡았다. 2004년 완공된 길이 34m의 중대교 앞에 섰다. 골짜기 물이 모여 물레방아 돌릴 위력이고 바위에 부딪쳐 천둥소리를 내며 물거품은 여울지건만 너럭바위는 예나지금이나 움쩍하지 않는다. 다리 건너 오름길에서 오른쪽으로 수로 따라 가다 들 가운데로 가노라면 양면 주차가 가능한 넓은 길이 나온다. 저 멀리 병풍을 두른 듯한 산에 볼록볼록 봉우리 꿈틀거리고 아래 숲속에 기와집이 보인다. 담 벽에 밀착되게 입간판을 세웠다. 명창 유성준 이선유 판소리 기념관(名唱 劉成俊 李先有 板嗦哩 紀念館)이다. 판소리는 조선 중기 이후 남도지방 특유의 곡조를 토대로 광대 1명이 고수 1명의 장단에 맞추어 일정한 내용을 육성과 몸짓을 곁들어 서너 시간에 걸쳐 노래를 부르는 민속예술형태의 한 갈래이다. 오랜 수련을 통하여 득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제대로 부를 수 있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 대리석 주춧돌 위에 기둥을 얹어 누마루는 마당과 같은 높이이며 6칸 기와지붕 처마 밑에 획마다 끝이 아래 또는 위로 꿈틀거리는 칠성루(七星樓)를 새겨 걸었다. 안내인은 “뒤에 보이는 산이 북두칠성을 닮아 칠성봉이라 七星樓이 돠었지요. 하늘에 가까워 이 골짜기에 별을 단 사람이 많이 나온답니다. 별 세 개 김용순은 여기 출신이며 국회의원도 하였지요!” 전주 최씨로 대처로 나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기억을 더듬어 유성준의 무덤을 찾았으며 관리를 하고 있단다. 봉우리에서 뻗어 내려 전망이 좋은 곳에 터를 고르고 위로부터 기념관, 마당 좌우로 연수동 그리고 칠성루와 관리동이다. 묘소로 안내한다. 기념관과 녹차밭 옆에 칠성봉과 직선상에 위치한다. 돌로 담장을 치고 비석을 세웠다. 〈국창 유성준 선생 추모비(國唱 劉成俊 先生 追募婢). 민족의 창극 판소리 명창 유성준(劉成俊) 공은 1873년 3월 27일 악양에서 아버지 강릉유씨 경학과 어머니 장덕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의 창업에 힘을 보태 개국공신에 오른 유창(劉敞)의 후손이다. 공은 13세 전남 구례에서 판소리 명창 송우룡의 가르침을 받아 동편제 판소리로 명성을 얻어 서울로 진출 장안을 누비며 소리가락으로 이름을 날렸다. 29세 참봉벼슬을 받아 국창(國唱)에 오른 공은 같은 해 극장 협률사에서 김창환 등과 함께 판소리로 무대를 주름잡아 인산인해를 이룬 관객들은 수궁가와 적벽가에 열광하였다. 이후 판소리를 민중 예술장르로 승화시킨 공의 소리에 고종황제와 대원군도 감동하였다. 송만갑 등과 함께 판소리 5대 명창에 꼽힌 공은 나라가 일제 지배를 받자 악양 진주 경주 순천 등지에서 활약, 김정문 임방울 강도근 박동지 정광수 박귀희 등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를 길러냈다. 1949년 악양 상신대에서 향년 76세로 숨을 거둔 공은 시대적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민족 정서를 일깨운 위대한 예술인이었다. 하동 군민과 대한민국 판소리 동편제 명창기념사업회가 부지를 사들여 묘소를 단장하고 삼가 추모비를 세웁니다. 2010.5.〉 기념관에는 각종 기록물과 판소리를 담은 레코드 등을 볼 수 있고 옆방에는 차 마시며 담소할 수 있다. 다른 하동의 명창을 소개하고 있다. 〈이선유(李善有)는 1873년 하동군 악양면 대대리(大垈里, 신대리로 추정)에서 태어났다. 10세부터 소리공부를 시작하여 15세 구례 송우룡(1835-1897)을 찾아가 3년을 공부하였다. 1902년 전북 순창 김세종에게 가르침을 받아 30세를 바라볼 나이에 판소리로 일가를 이루었다. 1908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송만갑협률사(宋萬甲協律社)에 참여해 전국적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48세 악양면에서 진주시 영정(榮丁, 대안동)으로 이사하였다. 권번의 소리선생으로 활동하며 1930년 김수악에게 2년간 춘향가를 가르쳤다. 신숙 오비취 등에게 판소리를 사사하였다. 1949년 4월 진주시 장대동 자택에서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연수동은 크고 작은 장구 북 등이 비치되어 학생을 기다리고 있다. 칠성루에 오른다. 산마루로 둘러싸 병속에 들어온 듯하고 유난히 잘록한 부분이 있다. 보부상과 행인 들이 넘나들던 고개로 남명 조식이 악양동천을 찾았다가 돌아갔다 하여 회남재라 부른다. 지금은 청암호 물이 수월하게 터널로 넘어오고 있다. 눈앞에 형제봉은 펼쳐졌고 코밑에 사무동은 ’ㄱ’형의 팔작지붕이다. 두 처마 끝은 가까이 나란하다. 각각의 지붕에서 빗물을 홈에서 받는데 두 개의 홈을 연결하는 덮개는 수기와를 포개 볼록하면서 모양을 내고 있다. 대밭으로 새들이 날아들며 소리를 뽐내는 듯 ‘끼루륵~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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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수 대한민국에겐 너무 무겁다공무원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도와 계략에 의해서 증가되고 있는 면이 강하다. 증원에 관한 한, 한 부서 소속 공무원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귀결한다. 우리 부서에 업무가 조금 늘어났으니, 신임 담당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충원을 요청한다. 신임이 부임한다. 이 부서는 내부적으로 이 신임을 관리하는 등의 새로운 업무가 또 늘어난다. 또 새로운 신임의 충원을 요구한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 순간에도 공무원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다. 이런 현상을 파킨슨 법칙이라고 한다. 공무원들은 전직 등에 의한 직무, 책무의 재배치 보다는 신임의 충원을 더 선호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 조직내 인원이 늘어나면 관리직 자리가 늘어난다. 승진 기회가 오는 것이다. 이를 ‘상승하는 피라미드 법칙’이라고 한다. 문 정권 때 공무원이 많이 늘었다. 문재인 대선 후보는 후보 티비 토론회에서 공무원 수를 늘려 청년 고용난을 해소하겠다고 했다. 문은 직무 수행 첫날 바로 인천공항으로 갔다. 그곳의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주겠다고 한다. 공항공단은 자 회사를 설립하여 그들을 이름뿐인 정규직으로 전환시켰다. 당사자들에게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정규직들은 사회 정의에 반한다고 반발한다. 문 정권 5년간 13만명의 공무원이 늘었다. 역대 최대 증가 폭이다. 현재 공무원은 116만명이다. 대한민국 총 인구 대비 2.25%이다. 국가직(지방직 제외) 공무원은 문 정권 때 19.8% 증가 했다. 지난 5년간 전국의 학생 수는 40만명 가량 감소 했다. 반면 교육 공무원은 2만 여명 증가 했다. 국가직 공무원 인건비가 40조원을 돌파 했다. 문 정권 이전 보다 년간 9조원 늘었다. 현 정부는 매년 1%씩 공무원 수를 줄이겠다고 한다. 언발에 오줌 누기식이다. 선진 외국과 비교, 대한민국은 공무원이 너무 많다. 준공무원인 공기업, 시장형, 준 시장형 국영기업에 종사하는 수는 43만여에 이른다. 이들을 합쳐 타 선진국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의 공무원 수가 많은 편에 속한다. 특히 대한민국은 공무원 연금 부족분에 대한 보전 부담이 크다. 공무원 연금 운용으로 2030년에는 정부 보전금이 매년 16조 2170억이 투입되어야 한다. 이 금액은 매년 늘어 나고 있다. 공무원의 밥은 규제이다. 공공 조직이 방대하고, 딸린 공무원이 많아 규제 철폐를 못하는 실정이다. 그들에게 규제 철폐 여부를 물어보나 마나 이다. 공조직에 있어 조직이 방대해지다 보니, 의사결정의 신중함에 따른 이익보다는 지체로 인한 손실이 더 크다. 공무원 1인당 급여 포함 국가 부담은 년 평균 3억이다. 국가공무원법에 공무원의 퇴출에 관한 규정이 미약하다. ‘형의 선고, 징계 처분에 의하지 않고는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면직을 당하지 아니한다. ‘는 조항과, ‘직제와 정원의 개폐 또는 예산의 감소 등에 따라 폐직 또는 과원이 되었을 때 면직할 수 있다.’는 조항이 전부이다. 공무원법을 개정해야 한다. 구조조정 등에 의한 퇴출 조항을 신설해야 한다. 국가의 지속발전을 위해 공무원 사회의 문화와 구조가 변해야 한다. 호봉 폐지가 필요하다. 창의와 도전이 충만한 공무원 시회로 변모 되어야 한다. 시간만 흐르면 급여가 올라가는 체계는 미래 산업사회와 맞지 않는다. 전직 등의 공무 담당 범위를 유연화하여 넓혀야 한다. 증원을 필요로 할 때 일차로 내부에서 인력 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일부에서는 남아 도는데 다른 곳에서는 신규 충원을 하고 있어서는 안된다. 상무 정신과 정신 건강을 위해서 사격술 등급제를 실시해, 우수자에 대한 우대를 실시하여야 한다. 공조직을 재구조화 해야 대한민국이 지속발전가능하다. 이이의 십만 양병설이 공허하게 들리는 그 시대와 닮은 현재이다. 공무원 수와 제도 등에 문제가 있어 이를 바로 잡자고 했을 때 440여년 전의 모습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현재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