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소리와 아부의 패러독스

기사입력 2024.01.23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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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훈(주필)

    대부분 사람은 쓴소리보다 칭찬을 좋아한다. 쓴소리를 싫어하고 피하고 싶은 것은, 범인(凡人)에게 인지상정이다. 실제로 세상 살다 보면 쓴소리하는 것보다, 그냥 칭찬을 해주거나, 윗사람에게는 MSG를 첨가한 아부를 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

    쓴소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쓴소리하려면, 나름의 논거와 논리가 정연해야 한다. 왜 쓴소리하는지에 대한 합목적성과 보편적 가치를 말하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하고 상대를 설파할 수 있는 기승전결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쓴소리는 상대가 듣기는 불편하지만, 반드시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대안을 포함해야 하는 만큼 말을 꺼내는 것이 쉽지 않은 데다, 골치 아픈 것을 싫어하고, 번거로운 것을 피하고, 싶은 현대인에게 어쩌면 쓴소리보다 차라리 아부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고 생산적인-자기에게 이익이 되는-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또 쓴소리하더라도 내가 쓴소리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고 받아들여 개선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애초부터 들으려 하지 않거나 말해도 아예 개선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입을 꾹 닫게 된다.

    평범한 일반인의 경우 쓴소리를 싫어하고 자기가 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을 골라 만나도 딱히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사회적 직위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지도자가 쓴소리를 싫어하고 아부성 칭찬에 빠지게 되면 먼저 본인의 실패는 물론 그 리더가 맡고 있는 조직 전체에도 여러 문제와 함께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폐해를 알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에 있는 크고 작은 모임이나 조직의 리더들은 쓴소리보다 아부와 아첨을 좋아한다.

    비범한 리더의 경우 어떤 말이 자기에게 보약이 되고, 어떤 사람이 아부와 아첨하는지를 쉽게 가려낼 수 있으나 아부, 아첨꾼들 또한 리더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능력이 탁월한 까닭에 이마저도 쉽지 않다. 조직의 리더들은 아부꾼이 마음에도 없는 접대성 아부를 해도 그런 사람들이 대개 윗사람의 눈에 들게 되고, 인사고과를 잘 받아 승진도 빨리하는 것이 조직 세계의 공식처럼 되어있다.

    사전적 의미로 남의 마음에 들려고 비위를 맞추며 알랑거리는 것아부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이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에서 이득을 보려고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아첨꾼이라고 했다. 세상 살다 보면 의외로 아부·아첨하는 사람을 쉽게 보게 된다.

    아부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개인의 이익이 들어 있다. 그 이익이 재화일 수도, 권력이나 명예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장래 발생할 잠재적 이익을 위해 아부를 투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아부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한다.

    간혹 아부와 아첨을 싫어하는 리더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아부하는 사람이 일 잘하고 실력 있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그 리더도 아부와 아첨에 혹할 개연성이 농후하다. 아부를 싫어하는 리더는 대개 실력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고 실력 있는 아랫사람이 아부를 한다면, ‘아부아부로 듣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칭찬으로 들을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사실 아부칭찬을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다. 딱 분질러 이것은 아부이고 저것은 칭찬이라고 정의하기에는 경계가 모호하다. 개인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그래도 그 사람 말에 진정성과 애정이 담겨 있고, 제삼자가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면 칭찬으로 봐도 무방하다. 바꿔 말하면 마음에도 없는, 건성으로 칭찬한다면 그것은 아부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 우리는 스스로 돌아볼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듯하다. 자기가 조직이나 모임의 리더가 아니라도 나는 쓴소리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지금 당장은 자신이 리더나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본의든 본의 아니든 리더가 될 기회는 언제든지 상존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 주위에 쓴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자기만의 세계에 점점 고립되거나, 고립되어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전제할 때 자신에게 쓴소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남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징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쓴소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본인이 쓴소리 듣는 것을 싫어하고, 쓴소리를 하면 화를 내기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쓴소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부와 아첨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가 쓴소리를 싫어하면 아첨꾼만 남는다고 했다.

    아부와 아첨하는 것은 사실 아주 간단하다. 특정 사안을 놓고도 힘들게 연구하고 어렵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듣는 사람이 싫어할 만한 것은 쏙 빼고, 좋아할 것들만, 주저리주저리 호들갑 떨며 말하면 된다.

    쓴소리도 마다 않는 정상적인 사람이면 사장님이 말씀하신 A 사안은 이러이러한 문제점을 노정할 수 있고, 그와 같은 문제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대책을 세워 추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며 사전 사후 대책을 마련하여 보고하지만, 리더가 쓴소리를 싫어하고 아부, 아첨을 좋아하면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주변에 사장님에 대한 칭송이 자자합니다“, ”말씀하신 목표는 거뜬하게 달성될 것 같습니다와 같이 리더를 영혼 없이 추켜세우는 알랑방귀의 귀재들이 득세하게 된다.

    리더가 가장 경계하고 삼가야 할 것이 아부와 과잉충성이다. 리더가 쓴소리를 싫어하고 아부와 칭찬을 좋아하면 자연스레 과잉 충성을 부르게 된다.

    과잉 충성은 뇌세포를 단세포로 만들어 이성을 마비시킨다. 옳은 것을 보지 못하고, 밝은 길을 찾지 못하게 하는 사약과도 같은 존재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봐도 아부와 아첨으로 포장된 과잉 충성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심지어 나라의 문을 닫게 하는 사례는 숱하게 많다.

    과잉 충성을 일삼는 아첨꾼은 계산의 천재라는 중요한 특질을 가지고 있다. 영전, 권력, 부귀영화로 가는 방정식을 계산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자기에게 이익이 있다면 자신이 모시고 있는 리더가 설사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벼랑 끝으로 길을 안내한다. 끊임없이 그 길이 옳은 길이라고 주술하며 나락의 길로 몰고 간다. 홀리는 언설(言說)과 교언영색(巧言令色)에는 남다른 재주가 있어 빠져나오기도 쉽지 않다.

    리더의 권력이 크면 클수록 이런 자들에 의한 비극은 자주 발생한다. 총애와 신임을 무기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가 허다하다.

    아부와 아첨 그리고 과잉 충성이 활개 치는 이면에는 잘못된 우리의 정치문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권력의 향배에 따라 신념과 절개는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고, 카멜레온적 변신만이 살아남은 역사적 교훈(?)을 아부, 아첨꾼들은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과잉 충성의 이면에는 반드시 라고 할 만큼 배신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과잉 충성을 일삼는 아첨꾼들은 출중한 계산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새로운 권력자가 나타날 낌새가 보이거나, 나타나면 곧장 지금까지 관계를 맺어 왔던 끈 떨어진 리더를 버리고 주판을 튕기며, 밀거래를 시작한다.

    리더가 쓴소리를 싫어한다는 것은, 스스로 아첨꾼을 부르는 것이고, 과잉 충성을 조장하는 것이다. 결국 화를 자초하는 길일 수도 있다.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아부와 배신은 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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