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기사입력 2024.01.22 10:05

SNS 공유하기

fa tw
  • ba
  • ka ks url

    겨울비가 내린다. 얼었던 것들이 녹는다. 마당 가운데 놓여 있는 큰 통에 담긴 빗물은 날씨에 따라 얼음이 얼었다 녹았다 한다. 조금 더 추운 날은 두껍게, 덜 추운 날은 얇게 얼려 그 날을 연출한다.

    비가 내리면 화단 주변에 떨어진 나뭇잎들로 온 마당이 을씨년스러워진다. 잠깐 비가 멈춘 사이에 키가 큰 비로 눈에 띄는 곳이라도 비질을 해본다. 녹은 흙은 부드럽고 비에 젖은 나뭇잎을 치우기가 쉽지 않다. 장갑 낀 손으로 나뭇잎을 줍던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작은 것들이 있다. 수선화다.

    1월 초에 소한이 지나고 엊그제 대한이 지났다. 그러나 봄은 아직 멀었는데이 철없는 녀석이 벌써 싹을 틔웠다. 괜찮을까. 걱정스럽다. 수선화의 출현으로 여기저기 화단을 살피기 시작한다. 겨울 지나 찾아 올 꽃샘추위도 남았는데

    목련도 추위 속에 당당하다. 봉우리 끝에 털을 내어 봉우리 안을 보호하고 있는 듯하다. 알프스민들레도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넓히고 있는 중이다. 몇 포기 얻어다 싶은 상추도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에 뿌리를 조금 드러낸 백합도 건재하다.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대문이 열리지 않는다. 방부목과 철로 만든 대문은 내 키보다 크다. 한참을 잡고 씨름을 해보아도 결국 허탕이다. 철로 만든 것들에 빗물이 묻고 그것들이 얼어서 힘이 세어진 모양이다. 몇 번을 밀어 보았으나 얼음이 녹기 전에 열기는 어려울 것 같아 다시 돌아 들어온다.

    대문에 심어 아치로 올린 개나리쟈스민을 가까이서 보려했는데 텃밭으로 들어가 울타리 사이로 바라본다. 작은 잎들이 추위에도 파랗다. 낮은 담장에 피어 있는 핑크빛 찔레도 푸른 잎을 달고 봄을 기다리고 있다. 수국도 딱딱한 가지 사이로 조그만 눈들을 달기 시작했다.

    기다리면서 또 참아가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하고 있는 자연을 바라보면 닫혀 있던 마음이 삐끔 열리기 시작하고, 좁기만 하던 마음의 언저리가 조금씩 넓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사람이 만든 대문은 얼어서 열리지도 않지만, 자연은 언제나 열려 있어 어떤 모습의 우리든 기꺼이 맞아준다.

    가을에 수확하지 못하고 넘긴 돼지감자를 며칠 전 수확했다. 그대로 두면 너무 많은 싹들이 돋아나서 온 밭을 채울까 걱정스럽기도 하고, 당뇨에 좋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기도 해서였다. 가을에 전부 수확하지 않아도 다음해 3월까지 묻어 둔 채로 조금씩 수확해서 사용해도 된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파나 무를 땅에 보관하는 것처럼.

    크기가 큰 것들은 씻거나 자르기가 쉽지만 마늘쪽만큼 작은 것들은 자르기도 씻기도 힘이 들었다. 작년에 장만하지 않고 보낸 돼지감자로 아픈 친구에게 일거리만 보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꺼번에 하지 말고 조금씩 장만하여 모았다가 친구에게 보낼 생각을 하니 즐거운 마음이 든다. 내 텃밭의 것을 수확하여 내 손으로 장만하고 마음까지 담아 보낼 생각이다. 당뇨수치가 낮아졌다는 톤이 높아진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수선화의 인사로 갑자기 바빠진 아침, 해가 뜨면 대문의 빗장을 열고 마당 가득 햇빛과 바람으로 채워보리라. 수선화를 좋아하는 손녀 희연이가 이번 주에 온다고 했지. 꽃이 피기 전 모습을 보여준다면 무슨 말을 할까? 세 살이나 되었을까, 그 봄에 갸우뚱한 고개로 수선화에게 인사를 건네던 아이의 모습이 내 사진첩에 남아 있는데. 초등학생이 된 지금은 어떤 표정으로 꽃이 피지 않은 수선화에게 인사를 건넬까 사뭇 궁금하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