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샘과 완사천

기사입력 2024.01.2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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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명영(전 하동고 교장)

    왕비샘 안내판 앞에 섰다. 〈금오산에서 뻗어 내려온 신덕마을의 웃담 남쪽 기슭에 조그만 샘이 있다. 옛날 어느 왕이 이곳을 지나다가 몹시 목이 갈해 물을 긷고 있던 처녀에게 물을 청하니 처녀는 물을 한바가지 떠서 버들잎을 훑어 넣어 왕에게 주었다. 왕은 이상히 여겨 왜 버들잎을 넣느냐고 물으니 처녀가 목이 마른 상태에서 급히 물을 마시게 되면 몸이 상할까 염려되어 그렇게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왕은 기특하게 생각하고 후일 그 처녀를 불러 왕비로 삼았다〉. 한적한 곳에서 대하는 안내문은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한다. 그 왕은 과연 누구일까? 조선시대는 일부일처제로 1인의 왕비에 다수의 후궁 또는 첩이 있었고 고려시대 왕실은 일부다처제로 29명의 왕비를 거둔 태조 왕건이 아닐까?

    왕비샘과 유사한 설화로 나주 완사천(浣紗泉)이다. 왕비샘은 우리말 ‘샘’으로 완사천은 ‘泉(천)을 시용하고 있다. ‘샘’은 물이 땅에서 솟아 나오는 곳 또는 그 물이다. 한자 泉은 우리말 뜻은 ‘샘’이요 음을 ‘천’으로 옮긴 것으로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을 나타내는 중국의 문자이다. 완사천의 浣은 ‘빨 완’이고 紗은 ‘비단 사’이다. 왕건이 궁예의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와서 목포(나주역 일원)에 배를 정박시키고 물가 위를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서려 있어 신기하게 여겨 가보니 아름다운 처녀가 우물가에 빨래를 하고 있었다.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처녀는 대범하게 바가지에 물을 떠 버들잎을 띄워 건넸다.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까! 하여 천천히 마시도록 한 것이다. 왕건은 처녀의 총명함에 끌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장화왕후 오씨 부인이고 아들 무(武)가 고려 2대 왕에 오른 혜종(惠宗)이다. 장화왕후는 나주에서 대대로 소금을 생산하던 호족 오다련의 딸이다. 이곳은 서라벌과 당나라를 연안 항해로 오갈 때 반드시 지나는 길목인데다 서해안에서 내려올 때도 만나는 교차점으로 상업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오다련은 신라 6두품 연위의 사위가 된 것에서 지방 세력자로서 위세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완사천은 나주 시청 앞 300m 지점, 국도 13호선 주변에 있는 옹달샘으로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의 만남을 기념하는 조형물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하여 널리 알리고 있다.

    왕건 부인들을 출신지별로 분류하면 황해도 9명, 경기도 4명, 강원도 3명, 충청도 3명, 경상도 6명, 전라도 2명, 지역 미상 2명이다. 특히 경기도 광주의 광주원부인 왕씨와 소광주원부인 왕씨, 동주의 소서원부인 김씨와 대서원부인 김씨는 친자매였다. 완사천 오씨부인과 왕비샘 처녀의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훑어 넣어 왕에게 주었다’는 총명함은 대등하다. 《고려사 왕비열전》 등의 문헌을 조사하면 왑비샘의 전설은 사실로 밝혀질 것이다.

    신덕마을은 금오산 산록 동남쪽에 산이 둘러쳐져 마을을 내려다보며, 낮은 산 좁은 골로 이어지고 정마산 앞산(안산)이 마을을 안아주고 1950년대 작은 골, 중간 땀, 아래 땀, 굼텅 몰, 열 두 모퉁이에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아래 땀에만 집이 있으며 여타 곳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신덕마을은 1914년 행정개편에 성평리 신덕으로 되었고 1965년 성평리 산 90번지 ‘바위안’이라는 곳에서 금동여래입상 1점, 수불동에서 금동보살입상 1점, 석경 1점 및 고려자기가 출토되었다. 문경 송씨와 충주 지씨 등이 살았다. 한다사 성립과 그 연원을 역사적으로 같이 하며 불교문화가 화려했던 곳이다. 고개 너머에 하동포구로 연결되는 주교장터가 있었다. 가야국, 백제, 신라, 중국, 일본과 교역의 남해안 중심지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은밀히 당고종을 만나려 가는 김춘추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왕비샘의 그 처녀는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왕건이 순행을 하다가 만난 이 지역 실권자의 딸이 아닐까! 

    왕비샘 위쪽 밭 귀퉁이에 거처를 마련하고 산다는 송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이 있었던 자리가 밭이 되었지만 8남매가 살았다. 동생들은 공부하러 타지로 나갔고 장남이라 부모님을 모시고 남았다. 객지 생활하다 귀향했다 한다. 왕비샘을 수리하다 바닥에서 굵은 나무토막을 발견했다. 요모조모 살펴보니 수양버들 뿌리라 왕비샘 전설이 사실로 밝혀지게 되었단다. 참게가 올라와 살았는데 물길을 돌리자 샘물이 졸아들어 기어 나오는 참게를 잡을 수 있었고 근방에서 유일하게 백운산을 볼 수 있는 명당이란다. 건너편에서 금동불상 등이 나왔고 소먹이면서 뛰고 놀던 거대한 고인돌이 있었다 한다. 고인돌에 관심을 보이자 “그래요, 옛 고하초등학교를 찾아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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