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교교 그리고 명교마을

기사입력 2024.01.17 09:06

SNS 공유하기

fa tw
  • ba
  • ka ks url
    안명영(전 하동고 교장)

    일기마을에서 주교천 위에 걸쳐진 명교다리(銘橋橋)를 건너자 둑길에 목재합판 안내판을 볼 수 있다. 유선형 테두리 안에 나비가 날개를 펴고 날아드는 그림 앞에 〈명교리. 전통과 문화가 숨쉬는…성평권역 배드리길〉로 제목을 뽑고 글과 지형도로 꾸몄다. 좌측 아래 ‘코스범례’는 겨우 읽을 수 있고 안내는 지워졌다. 드문드문 글귀와 그림은 떨어져 나갔지만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역사적 자료를 펼쳤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고현면(古縣面)이었다. 이때 명교(銘橋)와 일기(日基)를 합쳐 명교리(銘橋里)라 하였다. 명교마을은 뒷산 따라 동향으로 길게 펼쳐져 있고 광복 후 숲 너머 10여 호의 마을이 형성되어 두○으로 되었다. 언제 마을이 생겼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옛 하동(河東)의 읍기가 한다사(韓多沙, 250년)때 이웃 마을인 고하(古河)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살고 있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우측 상단에 비스듬하게 방위표가 있다. 왼쪽을 E, 오른쪽을 W, 상 S, 하 N이다. 방위표대로 읽으면 주교천은 서쪽으로 흐르다 남으로 치솟아 현 위치를 지나 북서로 방향을 바꿔 성평교에 이른다. 우리나라 지형은 북과 동이 높고 남과 서는 낮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남・서해로 들어간다. 주교천은 조개섬에서 섬진강에 합류되는데 남북을 축으로 동과 서로 치우친 경우는 있지만 북으로 거슬러 흐를 수 없다. 중국의 河東은 황하가 급격히 남으로 흐르다가 동으로 방향을 바꾸는 지역이다. 우리의 하동은 섬진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 하동송림에서 동으로 흘러 남해로 빠져든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중국식 2字 지명으로 개정에서 河東으로 되었다.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다. 오래전의 나를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일기(日記)를 통하여 어제의 나를 알 수 있다. 왕은 일기를 작성하기 어렵지만 사관이 따라 다니면서 왕과 관료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빠짐없이 적은 사초(史草)와 춘추관 사관들이 3년마다 작성한 사초와 각 관청의 기록물을 모아 별도로 시정기(時政記)를 만들어 의정부와 사고에 보관한다. 왕의 사후, 실록청을 설치하고 객관성과 사실성을 인정받는 실록을 편찬하였다. 실로 기록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것이다. 본문에 〈옛 하동의 읍기가 한다사(250년)때 이웃 마을인 고하에 있었다〉에서 한다사는 나라 이름으로 몇 년을 존속했고 언제부터 불리던 국명일까! 그리고 이전의 나라 이름은 무엇일까? 안내판 옆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햇볕막이 밑에 의자가 있고 ‘명교 빨래터’라고 알리고 있다. 주교천이 직선화되기 전에 빨래 감을 운반하여 여기에서 방망이로 때려가면서 빨래를 했다? 마을 우물가를 지칭하는 것인가?

    동으로 흘러내린 산줄기가 주교천을 건너지 못하여 멈춘 기슭에 표지석에 ‘명교마을’이라 새겼다. ‘명’과 ‘마’의 모음 ㅕ, ㅏ는 도마뱀을 연상하게 한다. ‘명’자는 도마뱀이 돌담을 올라가는 형세이며, ‘마’는 담을 다 올라간 도마뱀이 날아오르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시계 바늘이 12에 정지한 상태를 현재로 보고 오른쪽으로 회전하면 미래, 왼쪽으로 움직임을 과거로 향하는 것으로 본다면 두 글자는 좌로 움직이는 형상이라 과거에 방점이 찍은 듯하다. 표지석 옆에 기둥을 세우고 기와지붕을 얹고 용마루에 오리를 앉혔는데 머리는 마을로 향한다. 안내하기를 〈명교리 명교마을. 옛 이름은 ‘조신더리’라 불리고 있다. ‘쪼신다리’가 옳은 것 같으나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하여 ‘조신더리’가 된 것 같다. 명교교 아래쪽에 돌을 쪼아서 놓은 다리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죠신다리’로 되었다〉. 사진으로 흔적을 대신하면 좋겠다!

    명교마을을 들어서면 산줄기 내려오다 완만하게 구릉이 되고 숲 속에 300년 된 보호수 팽나무와 정자(亭子)가 있다. 고전면민이 다듬은 오석에 새기기를〈고인돌 공원. 고인돌은 선사시대의 무덤이다. 물고기와 나무 열매를 구하기 쉬운 장소로 이주하며 생활하다 하천과 들이 있고 구릉이 있는 길지에 집단 거주를 하게 된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죽으면 전망이 좋은 장소에 무덤방을 만들어 시신을 묻고 그 위에 여러 개의 돌을 받치고 넓은 덮개돌을 얹었다〉. 명교리에 고인돌이 있어 오래 전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이다. 주교천이 흘러 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 들판을 살지게 하며 비평산에서 산짐승을 잡거나 열매를 손쉽게 채취할 수 있어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 것이다. 점차 부족사회로 발전되어 서기 250년경 산 넘어 고하마을과 더불어 한다사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겠지!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