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백의종군로 니사재

기사입력 2023.12.1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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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명영(전 하동고 교장)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진중에서 쓴 일기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개월 전 선조 25년(1592) 1월 1일부터 선조 31년(1598) 11월 17일까지를 기록한 것으로 국보이다. 난중일기란 제목은 이순신 사후 200년이 지나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집할 때 붙여진 이름이다.

    난중일기 백의종군편은 1597년 4월 1일부터 8월 2일까지이며 하동으로 들어오고 하동으로 나간다. 도원수 권율 진영으로 가는 길에 악양과 두치에서 각각 1박, 하동읍성에서 2박하고 청수역을 거쳐 북방으로 길을 잡아 덕천강변을 따라 이동한다. 정개산성 아래에서 나룻배로 원계에 내린다. 금만촌에 들어 감나무골을 지나 남사리에 도착하여 1박하고 삼가를 거쳐 합천 도원수 권율 휘하에 머문다. 칠천량 해전의 참패를 보고 받고 도원수와 전략을 논하다 해안지방을 직접 둘러보면서 옥종에서 5일을 머문다. 원계 손경례 집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재임용교서를 받고 임지로 가는 한나절 하루 밤을 하동에서 보내는 일정이다.

    이순신은 하동읍성에서 길을 나선다. 〈1597. 6. 1. 경신. 비가 계속 내렸다. 하동읍성에서 일찍 출발하여 청수역 시냇가 정자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였다. 저물어 단성 땅과 진주 땅의 경계에 있는 박호원의 농사짓는 종의 집에 투숙하려는데 주인이 반갑게 대하기는 하나 잠자는 방이 좋지 못하여 간신히 밤을 지냈다. 장지 두 권, 백미 한 섬, 소금 다섯 말 등을 하동 현감이 보냈다〉.

    남사예담촌의 니사교(尼泗橋)를 건너자 이순신백의종군로 표지석을 볼 수 있다. 〈니사재(尼泗齊).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권율 도원수부가 있는 합천(율곡)으로 가던 길에 하룻밤 유숙한 곳이다. 1597.6.1. 이순신 장군은 억수처럼 내리는 빗속에서 청수역을 떠나 단성에 이르러 박호원의 농사짓는 이곳의 노비집에 하루를 묵었다〉. 尼와 泗의 뜻은 ‘여승’ 그리고 ‘물 이름’이고 음은 ‘니’와 ‘사’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지역의 유력한 집안인 박호원 내력을 알고 이곳에 유숙한 것이다. 그러나 밤새도록 내리는 비에 방마저 좋지 않아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장군은 아침 일찍 삼가현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박호원은 세종 때 황희 정승의 5대 손녀와 결혼한 박이의 아들로 본관은 밀양이며 호는 송월당이다. 명종 17년(1562) 임꺽정 도적을 진압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고 호조판서・참판을 역임하기도 했다. 니사재는 박호원의 재실로 철종 8년(1857)에 건립하였다〉.

    볏짚으로 지붕을 단장한 초가집으로 사랑채와 몸채이다. 이순신은 사랑채에 유숙했을까 아니면 주인이 안채를 내어 주었을까! 집 옆으로 축대를 쌓고 아슬아슬 돌계단을 오르자 거유문(居由門)이다. 고개를 숙이고 출입하라고 낮고도 좁다. 고개를 들자 처마 밑에 니사재(尼泗齊) 현판이 고개를 거듭 숨이게 한다. 좌측으로 울창한 매화나무 앞에 안내판이 있다. 〈나사재 매화나무(박씨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시 박호원 농노집에 유숙할 때 매화나무를 보고 위안을 삼았다는 유래에서 후계목으로 가꾸어 오고 있다〉. 이순신 유숙한 260년 지나 니사재가 건립되었고 매화를 심어 귀인을 챙기는 후손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다.

    본채 옆에 오래된 배롱나무가 꽃을 피운다. 가지 아래 사각형 연못과 가운데 둥근 돌을 심었다. 물풀이 수면을 덮고 노란 꽃이 피었다. 방지(方志)는 품위를 높이고 집안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는 장치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天圓地方)는 우주관을 보여 주는 것으로 육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우주의 형체를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는 장점 때문에 서양천문학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고대 우주관의 주류로 자리매김해왔다.

    가운데 기둥 사이에 마루 보다 한 뼘 낮춰 가로 판자를 붙여 오르기 쉽고 걸터앉아 주변을 살피게 장치하였다.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니 담장과 처마 사이로 우뚝 솟은 봉우리는 니구산(尼丘山)이라 불린다. 공자가 태어난 추읍(지금의 산동성 곡부시 동남쪽)의 니구산, 남사예담촌을 돌아 흐르는 泗水川도 추읍을 흐르는 泗水에서 빌려온 이름으로 볼 수 있겠다.

    공자(BC 551~479)는 尼丘山에서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가 기도를 드려 태어났다. 그의 머리 중앙이 들어간 반면 주위가 불쑥 돋아 있어 이름을 구(丘:언덕)라하고 자를 중니(仲尼)라 하였다. 경북 대구의 ‘구’를 丘로 하려다 공자 이름을 피하려 邱로 했다는 설이 전하고 있다. 이곳의 산 이름을 바다 건너 머나먼 중국의 니구산을 빌려온 것은 얼마나 공자를 흠모하는지를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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