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역 유정천리 고향역 안명영 (전 하동고 교장)

기사입력 2022.03.2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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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역 유정천리 고향역

     

    안명영 (전 하동고 교장)

     

    1974년 12월 20일. 전국일주에 뜻을 모은 세 사람은 배낭 속에 전국지도 우편엽서 메모장을 넣고 긴 여정에 올랐다. 진주역에서 출발하여 첫 목적지는 하동역이다. 색 바랜 여행일지에 그날의 기록을 담고 있다. 

    역 건물 옥상에 세운 반원형 아크릴 조형물에 ‘하동역’을 적었다. 

    광장 가운데 화강암 기단 위에 다듬은 돌을 펼쳤다. 글씨는 드물게 보는 양면 모두 가로쓰기이다. 

    왼쪽 돌에 또록또록하게 慶全線全通(경전선전통) 大統領 朴正熙(대통령 박정희) 1968년 2월 7일. 全通이란 단어가 낯설다. 길, 다리 따위를 완성하거나 이어 통하게 하는 開通이란 단어가 맞는 것이 아닐까! 메모장에 빨간색으로 표시하였다. 

    오른쪽 돌에 취지를 새겼다.

    여기 건설의 의욕은 또 하나의 역사를 기록했다. 지리산과 섬진강물이 영남과 호남을 가로 막아 백리가 천리만 같이 멀고 어려운 길이더니 진주와 순천 80킬로를 연결하는 경전선 개통으로 단숨에 내닫게 되었다. 

    이 사이 역은 비록 13개 밖에 안 되지만 27개의 터널을 뚫고 38개 교량을 놓았다. 

    1964년 4월 기공하여 4년 만에 연인원 252만이 땀을 흘렸다. 이로부터 영호남은 한 고을인양 쉽게 이어져 겨레의 살림에 큰 이익을 끼칠 것이라 못내 느꺼워 여기 섬진강을 굽어보는 언덕머리에 비석을 세워 공사의 전말과 함께 오늘의 감격을 새겨둔다. 이은상 글 이철경 글씨.

    여행 첫날밤은 과우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하고 찾았더니 청암골에 벌목 중이라 한다. 과우의 어머니가 아들 대하듯 하얀 쌀밥을 고봉으로 올려 주시고 진한 막걸리도 주신다. 

    저녁에 송림을 걸어보고 미팅 파트너 집을 찾아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일일 여행평가 결과 부설 중인 길이나 선로 따위가 통합하는 全通이란 단어가 합당하다는 결론과 가로쓰기는 엄청난 변화라고 입을 모았다. 

    뒷날 하동공원에 올라 1971년 건립한 충혼탑을 둘러보았다. 화강석으로 1층 2층은 3단, 삼층은 13단으로 구성되었다. 삼층에 忠魂을 구리판에 새겨 고정시켰다. 충혼탑 옆에 경찰희생자 추모전적비와 한청기동대의 전공 충혼탑이 있다. 섬호정을 내려와 섬진강 쪽 기슭 고목 아래 꽐꽐 넘치는 우물이 있다. 천년을 당당히 살아온 나무라고 ’천당수‘라고 명명하였다. 섬진교를 건너고 무동산을 돌아 걷는 본격적으로 무전여행은 시작되었다.

    젊은 날 전국일주 무전여행을 마무리한 48년 뒤, 비 오는 날 오후 계성마을 지나 쇠고개 마루를 넘고 구불구불 돌고 돌자 너뱅이들이 크게 작게도 보인다. 비파삼거리를 돌아 내려가면 정이 있는 천리 고향역이다. 

    옥상에 아크릴은 남아있고 ‘하동역’ 글자는 사라졌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광장에 차들이 듬성듬성 자리를 차지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해서체 기념비를 볼 수 없다. 

    역사 벽에 그림을 채웠다. 

    사랑방에 등잔불을 켜고 상투머리 청년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옆에 새끼를 꼬다가 깍지 낀 총각은 들어 누워있고, 호롱불을 켜고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네는 아이를 안고 있다. 수건을 쓴 아주머니는 평상에 앉아 체에 녹차를 비비고 대 바구니에 멸치를 말리고 있다. 두건을 쓴 남자들은 녹차를 딴다.

    옷 젖는 줄도 모르고 다가가자 ‘하동역 이전’이라는 퇴색된 벽보가 있다. 하동역은 비파섬 건너 새 하동역으로 2016년 7월 14일 이전했다는 것이다. 그 명품도 옮겼단 말인가!

    플랫폼(platform)에 들어서자 그 기념비는 있다. 인간사 보고 듣고 하였을 벚나무 두 그루 고목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동역은 유정천리 고향역이다. 

    김연동 시인은 하동역을 회상하게 한다.

    삼엄한 입영열차 가림 막 틈 사이로 반기듯 다가오는 낯익은 철로 변에 해맑은 코스모스가 전송하듯 흔들었다. 

    팔월 그 뜨겁던 날 태극기를 든 어머니가 재 너머 시오리를 허둥지둥 달려 나와 애절히 아들을 찾던 눈물고인 하동역 흰모시 치마 적삼 눈에 띄게 다려 입고 “우리 아들 어디 있소”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신발도 벗겨져 버린 버선발이 아팠다.

    분단의 앙금 같은 어두운 창을 열고 얼굴을 내 보이며 손 흔들 수 있었다면 어머니 눈물로 뿌린 기적 소리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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