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두치장 괘서 안명영(전 하동고 교장)

기사입력 2021.12.05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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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두치장 괘서

     

    안명영(전 하동고 교장)

     

     조선 후기 사회를 개변시키거나 조정을 뒤엎으려는 세력들에 의해 여러 가지 비기・도참설이 나오고 있었다. 이런 설을 퍼뜨리면서 세력을 규합하여 변란을 일으키려는 무리들도 등장하였다. 

     삼신산으로 알려져 있는 지리산은 종종 이에 이용되었는데, 하동은 지리산 남쪽에 자리하고 섬진강 하류의 동쪽 언덕에 있는 두치장은 하동부 관아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영・호남의 사람들이 모인다. 

     장날이 되면 섬에서 수백 척의 배가 해산물을 싣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강에서 내려온 배 10여 척은 육지의 물산을 포장하여 강을 따라 내려와 긴 언덕에 줄지어 정박하였다. 두치장은 이와 같이 번화한 곳이라 일부 변란 세력은 장날을 이용해 사람들을 선동하려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순조 1년(1801) 6월 13일, 하동 두치 장터에 괘서(掛書 : 대자보)가 나붙었다. 

    “재주와 능력이 있어도 제대로 하는 일이 없고 실농한 사람들은 일어나라. 재상이 될 만한 자 재상을 시키고, 장수가 될 만 한 자 장수를 시키며, 지모가 있는 자 쓰임을 얻을 것이며, 가난한 자 부유해질 것이며, 두려워하는 자 숨겨줄 것이다.” 말미에 十爭一口(십쟁일구)라는 글자가 적혔다. 사람들은 十爭一口라는 알쏭달쏭한 구절의 의미를 생각해 내느라고 애를 쓴다.

     하동 주변에서 그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7월 중순에는 의령의 막근동에서 두 번, 며칠 뒤에는 창원에서 한 번 나붙었다. 

     괘서 사건이 잇따르자 조정도 바짝 긴장했다. 사건의 실마리는 의령 사건을 수사하면서 진척이 있었고, 十爭一口의 뜻도 풀이된다. 

    “爭의 윗부분의 爪(조)는 月(월)이고 밑에 있는 尹(윤)은 甲(갑)이 된다. 一은 口와 합하면 日이 되므로 十月甲日 즉 10월 甲子일에 해당하는 21일에 변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당시 하동 두치장의 모습을 보부상의 애환을 담은 김주영 소설 《객주》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진주를 떠나 하동에 닿자면 그 경계까지가 70리, 객사(客舍)에서 5리 상거인 두치(頭置) 장터에 당도하지면, 진주 주막거리에서도 일백리가 좋이 되는 길이었다. 

    하동만 하더라도 초하룻 화개장, 초이틀 두치장, 초사흘 진교장, 초사흘 횡포장, 초닷새 선교장, 초나흘 개치원장이 있을뿐더러 전라도 구례 길에서 넘어오는 황앗짐장수들과 섬진강 하류에서는 해물장수들이 쉴 참 없이 모여들었고 남해에선 유자, 치자, 비자가 났지만 지금은 철이 아니었고 거기서 나오는 모시(南苧 : 남저)가 가끔 하동으로 흘러나온다는 풍문이 있었다.

     마전역 어름에서 잠시 숨을 돌린 일행(석가, 월이, 최돌이)은 첫닭이 홰를 친 다음에야 두치장터거리에 당도하였다. 우선 객주에 물화를 맡겨 하매자(下買者)를 만나자면 날부터 새고 보아야 하겠기에 장터거리로 들어가서 도선목에 가까운 숫막(주막)에 행리들을 풀었다. 그들이 든 숫막은 강 건너 진영의 불빛이 희미하게 바라보이는 섬진강나루여서 전라도 광양땅이 바로 코앞이었다. 

     노량에서부터 섬진강을 거슬러 하동포구까지 올라가는 이수가 80여 리요, 그 80여리의 숱한 나루에는 50여척의 행상선들이 뱃전을 비비며 물화를 주고받았다. 내노라하는 장돌임들이라면 한 두 번은 하동포구를 거친 경험이 있었다. 두치장 괘서 사건의 연루자는 색출되어 벌을 받는다.  

     하동읍기(河東邑基)는 임진왜란 이후 자주 옮겼다. 조선 태종 17년(1417)에 고전면 고하리 양경산에 동·서·남벽에는 성문과 옹성, 치성, 해자를 설치하고 밖으로 양마장을 쌓고 산줄기에 형성된 골짜기를 감싸 안은 마름모꼴로 하동읍성을 축성하여 행정·군사적 중심지로 활용, 1593년 가등청정 군대가 읍성을 불태워 폐허, 1661년 횡포(橫浦)로 옮겼다가 1679년 다시 구읍으로 환원하였다. 1703년 진답면 두곡리로 옮기고, 이듬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730년 읍의 터전이 좁고 평탄하지 못하다 나동으로 옮기고, 1745년 부사 전천상이 현재의 자리 항촌으로 변경하였으며 하동송림도 조성하였다. 

     하동은 섬진강 물길 따라 읍기를 옮기고 장터도 이동하였다. 이 같은 변천에 하동인의 역동적인 에너지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하동 발전에 그 에너지와 강에서 익힌 지혜를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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