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 청렴연수 안명영(전 하동고 교장)

기사입력 2021.11.13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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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원 청렴연수

    안명영(전 하동고 교장) 

     안동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도산서원에서 주최하는 청렴연수를 이수하였다.

    퇴계선생은 21세에 김해 허씨를 아내로 맞았는데 부인을 항상 친구로 대하듯 하였다. 처가는 의령 칠곡면 도산마을로 초기에는 퇴계의 고향과 연관하여 소도산(小陶山)으로 불렸다.

     선생은 의령 처가에 자주 들러 지역 선비들과 교유를 하는 한편, 때때로 낚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큰 바위에 가례동천(嘉禮洞天)이라는 글씨를 남겼다. 동천(洞天)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

     그 바위벽은 가로 360cm, 세로 240cm이며 네 글자가 차지하는 크기는 가로 226cm, 세로 30-45cm이다. 우에서 좌로 배열하고, 가장 큰 禮는 폭33cm, 세로 45cm이다. 그런데 洞자와 天사이에는 세로로 바위틈이 넓게 벌어지고, 세월의 무게로 음각이 마모되어 윤곽이 흐릿하다. 특히 天은 식별이 어려운 상태이다. 수백년을 비바람에 노출되다보니 판독하기 어려워 전국에서 기대를 가지고 왔다가 돌아서는 발걸음 힘이 빠질 지경이다. 

     문화재 보존에 대한 인식이 변해야 한다. 보존(保存)은 잘 보호하고 거두어 보관하는 것으로 처음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훼손을 우려하여 접근을 금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주변을 울타리로 둘러쳐 비바람을 피하게 비각을 마련하고, 전문가에게 원형으로 복원시키는 것이 올바른 문화재 보존이라는 것으로 전환되어야겠다. 

     허씨 부인은 아들 준, 채를 남기고 결혼 6년 만에 숨을 거둔다. 부인의 무덤은 영주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퇴계선생이 직접 쓴 嘉禮洞天이란 유묵이 남아 있다. 

     선생의 둘째 아들 채는 외할아버지의 농사일을 감독하며 농사꾼으로 21세에 정혼을 해 놓고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급사한다. 채의 무덤은 가매장 했다가 외할아버지 선산에 이장되어 의령읍 무하리 고망봉 산기슭에 묻혔다.

     선생은 생과부가 된 며느리를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며 친정으로 되돌려 보냈다. 부녀자가 지켜야 할 도리나 사회규범을 과감하게 탈피하는 슬기로운 판단이다. 

     훗날 선생이 한양을 가다 민가에 하룻밤을 유하게 된다. 반찬도 입맛에 맞고 아침에는 족의를 내 오는데 발에 잘 맞았다. 행장을 꾸려 마을 어귀를 벗어날 때까지 담 모퉁이 뒤에 숨어서 보고 있던 안 주인이 한때 며느리였던 그 여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선생은 둘째 아들 채의 사망 등으로 심신이 쇠약했던 시절에 단양군수로 재직하였는데 기생 두향(杜香)을 만난다. 그녀가 푸른빛이 도는 백매화를 구해 드리자 “매화 향기는 맡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하며 그녀를 문향(聞香)이라 불렀다.

     명종 3년(1548) 10월, 넷째 형 이해가 충청감사로 내려오자 퇴계는 두향이 입던 치마폭에 死別已呑聲 生別常惻惻(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더라)라는 시를 적어주고, 단양군수를 사직하고 풍기군수로 부임하기 위하여 한나절 걸려 죽령 마루에 이른다. 관졸들이 삼 다발을 지고 앞에 나와서 말하기를,

    “아전에서 거둔 것으로 노자로 쓰기로 전례가 되었기에 바칩니다.” 

    “내가 명령한 것이 아닌데 왜 지고 왔느냐. 받을 수 없으니 가져가거라!”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올 때 행장에는 수석 두 개, 매화분 그리고 책 두어 짐뿐이었다. 책을 담았던 나무 상자조차 관졸들에게 되돌려 보냈다. 볼펜 하나라도 관물과 사물을 엄격히 구분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선생은 자주 소수서원에서 강학을 주도하여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마당에 청년이 쪼그리고 앉아 듣고는 기쁜 표정이다. 일어나게 하여 물으니 대답에 막힘이 없어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는 대장장이라 선생의 유일한 천민 신분의 제자 배순(裵純)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제자들이 중심되어 서원을 건립하였고, 선조 8년(1575)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는 편액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본산이 되었다. 

     그런데 陶자가 이상하다. 山으로 마무리되어야 하니 마지막 획은 아래로 그어야 하는데 가로로 그어 止로 된 기형적인 글자이다. 그리고 勹의 끝을 심하게 위로 올렸다. 천하 명필 한석봉이라도 임금님 앞이라 정신이 어지러워 이런 실수를 하였겠지만, 지금까지 그 글자 그대로 지켜오고 있는 것에서 ’뜻이 통하면 된다.’는 선조의 너그러운 마음을 엿볼 수 있겠다. 

     의욕적으로 일하다 생기는 실수를 용서하는 풍토야말로 청렴의 바람직한 모델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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