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참판댁 처마 밑에 걸린‘따바리’

기사입력 2009.04.10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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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아무 소설가/동화작가 읍내 시장에서 잡화상을 하셨던 아버지는 ‘이야기’를 싫어했다. 당신 스스로도 과묵하셨고, 남이 따따부따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도 질색팔색을 했다.
    그런데 명색이 집안 장남인 내가 ‘이야기’를 좋아했으니 일찍부터 아버지 눈밖에 난 것은 불문가지. 눈이 와도 태풍이 몰아쳐도, 일 년 365일 명절에도 가게 문을 닫지 않고 ‘애탕고탕’ 고생한 게 오로지 자식새끼들 위하느라 그런 것인데 틈만 나면 만화나 동화, 소설책을 끼고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당신에게는 교과서나 참고서 외에 다른 책은 몽땅 쓰레기였다.
    나는 자주 거짓말을 했고 또 자주 회초리로 맞았다. 내가 “이야기책 안 보고 공부했다” 거짓을 고할 때마다 아버지는 타박하며 하던 욕이 있었다. “에레기, 따바리로 자지 가리는 소리 작작해라, 이놈아.”
    따바리는 여자들이 무거운 물건을 머리에 일 때 머리의 충격을 덜기 위해 쓰는 물건이다. 표준어는 또아리다. 도너츠처럼 가운데가 뻥 뚫렸으니 그걸로 가운데를 가려봐야 헛일이다. 빤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하는 욕인데, 본래는 ‘자지’가 아닌 여성들의 성기를 가리키는 말이 들어간다.

    “따바리로 ×× 가리는 소리 하지 마라”

    삼월 삼짇날 전통문화행사가 열리는 최참판댁에 갔다가 처마 밑에 걸린 따바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늘 그 자리에 걸려 있었지만 눈이 마주친 건 처음이지 싶다.
    “오랜만이오.”
    “날 아시오?”
    “알다마다, 어릴 땐 내 아랫도리를 가려줄 뻔한 일도 있었는데.”
    “그런데 가만 있는 날 아는 체한 연유는 무엇이오?”
    “아니, 그냥 눈이 딱 마주쳐서….”
    “난 본래 그렇게 태어나서 항상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요.”
    “늘 그 자리에 있어서 지나치며 보아 왔는데, 오늘은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해서….”
    “음…,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드나들어도 아는 척하는 사람 하나 없었오.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것만 보려고 하지 하찮은 우리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아니오. 그래도 당신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다오.”
    “거짓말. 그거야 말로 정말 따바리로 ×× 가리는 소리구려.”
    “요즘 젊은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조금 나이든 사람들, 특히 여자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이 깃든 물건이지 않소. 물동이를 일 때도, 새참을 내갈 때도, 장에서 이런저런 찬거리를 사올 때도 늘 따바리를 썼는데.”
    “아련한 추억? 아닐 거요.”
    “아니라고요? 그럼…?”
    “징글징글한 악몽 같은 기억이라면 몰라도.”
    “설마….”
    “떠올려 보시오. 머리 위에 물동이든 자배기든 이고, 등에 갓난 아이 업고, 왼손엔 보따리 들고, 오른손엔 또 큰놈 붙잡고 가는 아낙네의 모습. 쪼그라져 굽은 허리로 지팡이를 짚고 세월의 무게를 이고 가는 노파의 모습. 예전 여인네들이 머리에 뭔가를 이고 갈 때 한번이라도 편한 모습을 보았소?”
    “음…,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그러니 여인네들도 나를 쳐다보지 않고 가버린다오.”
    “그래도 한번쯤 쳐다볼 만한데….”
    “최참판댁에 와도 모두들 서희가 지냈던 별당이나 윤씨부인이 기거하던 안채, 혹은 최치수가 썼던 사랑채만 대충대충 보고 가버리기 다반사라오. 우리처럼 작고 하찮은 것들은 보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오.”
    “그렇군요. 오히려 작은 물건들에 더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을 텐데.”
    “꽃도 그렇다오. 온통 매화니 벚꽃 구경한다고 난리들 아니오. 차가 막힌다고 투덜대면서도 다들 몰려다니면서 북새통을 만들지 않소. 그렇게 무리지어 피는 꽃만 꽃인가? 민들레, 씀바귀, 자운영, 조팝나무꽃, 솜양지꽃, 노루귀, 제비꽃, 금낭화, 현호색 등 찾아보면 봄에 피는 예쁜 꽃들 천지지 않소.”
    “그건 뭐, 그렇지요.”

    크고 화려한 것만 찾는 사람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다들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볼 뿐이었다. ‘거기에 뭐가 있기에 혼자 구시렁대느냐’ 하는 눈빛이었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 아니오. 크고 비싼 집, 그런 차, 좋은 옷, 컴퓨터 등.”
    “부끄러워지는구려.”
    “작고 하찮은 것의 대단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소.”
    “맞는 말이오. 권권복응(拳拳服膺), 나부터 마음 깊이 새겨 잊지 않으리다.”
    “하고 보니, 대언장어(大言壯語), 따바리 내 주제에 당치 않은 말을 지껄인 것 아닌가 저어되는구려.”
    “아니오. 우리 조상의 지혜가 숨어 있고, 수백 년 조상의 숨결이 스며 있는 진정한 민중의 역사가 아니겠소.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하오.”
    “그렇게까지 말해 주니 고맙소. 잘 가시오.”
    “들며 나며 자주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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