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117

(주)하동신문 0 4,680

조선조 말엽 권력자 흥선대원군 시대 어느날, 그의 거처 운현궁에 방방곡곡에서 밀려든 봉물(封物)짐이 대문 가득 쌓였는데, 어느 시골 선비가 보낸 것으로 알려진 작은 보퉁이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집사가 보퉁이를 풀어보니 볼품없는 낡은 왕골 돗자리 하나였다.
대원군은 별스런 물건을 본다는 표정을 지으며 집사에게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예, 이 돗자리가 바로 귀한「영상(領相) 수직석(手織席)」입니다!”
하고 집사는 돗자리의 내력을 설명했다.
아들 고종임금 등극과 함께 하루 아침에 권력과 부귀를 거머 쥐고 천하를 호령하던 대원군도, 집사로부터 그 돗자리의 내력을 듣고는 무엇보다 갑진 보물로 여겨 소중하게 다루도록하였다.
「영상수직석」이라 이름 지어진 돗자리는, 국정 최고 직위 영의정을 지낸 재상이 짠 방석이라하여 붙혀진 돗자리 브랜드였다.
약간 엉성하고 매끄럽지도 않은 이 볼품없는 방석이 바로 280여년 전 유명한 재상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 손수 짠 돗자리라는 것이었다.
선조·광해군·인조 3조에 걸쳐 관직 생활 64년 동안 정승 자리에서 40여년을 보낸 조선조 최고의 명정승이 곧 오리정승 이원익이었다.
그는 최고의 직위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지냈고, 임진·정유란과 정묘호란 등 국난을 겪으며 여섯 번 도체찰사(都體察使)를 맡아 군사를 지휘, 나라를 건지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위대한 정치가였다.
이원익은 태종 이방원의 열두번 째 왕자였던 익녕군(益寧君) 이치의 현손 이억재(李億載)의 아들로, 명종2년(1547) 오늘날의 서울 구로구 오류동(梧柳洞)에서 태어났다.
오류동은 명상 이원익이 살았던 버드나무가 많은 마을이라하여 지어진 지명이다.
이원익은 선조2년(1569) 21세 나이로 문과에 올라 벼슬을 시작했다. 왕족은 후손 4대까지 과거를 보지 못한다는 법도 때문에, 왕족 가운데 과거에 올라 벼슬하기는 이원익이 맨 처음이었다. 이원익은 여러 직위를 거쳐 대사헌, 호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는데, 그가 이조판서 때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는 평안도도순찰사를 겸해 왕의 피난길을 선도했고, 명나라 원군이 들어왔을때는 유창한 중국말로 명장(明將) 이여송을 설득, 거드름만 피우며 전쟁을 살살 회피하려는 명군을 일으켜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선조31년(1598) 이원익은 51세 나이로 처음 영의정에 올라, 왜란으로 헝클어진 국가 질서를 바로 잡고 민생을 보살피며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주기위한 개혁정책을 거샌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치기도 했다. 그는 당파에서 남인(南人)에 속했으나 공명정대한 일처리로 반대파들로부터 오히려 존경을 받았었다.
선조가 승하하자 등극한 광해군이 차츰 폭정을 시작하더니 드디어 영창대군 생모 인목대비를 폐위하려는 이른바 「폐모론(廢母論)」을 들고 나왔다. 이원익은 죽을 곳을 찾았다는 듯 거새게 항의했고 격분한 광해군은 그를 강원도 홍천으로 귀양 보내버렸다. 그로부터 8년 동안 고난을 겪고 풀려난 이원익은 옛 고향 여주에 낙향하니, 나이 72세 늙은이라 생계가 막막했다.
그의 돗자리 짜기는 이때 부터였다. 그는 부지런히 돗자리를 엮어 생계를 이었고, 가끔 남는 것은 이웃이나 먼 친척에게 선물로 보내기도했다. 이리하여 그가 짠 돗자리는 귀중품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기를 5년 보냈는데 갑자기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터져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등극했다. 권력을 쥔 서인들은 비록 반대파였지만 정국의 안정과 민심안정을 위해 이원익을 찾아내 영의정 자리에 앉혔더니 백성들이 환호 했다.
그는 인조 초기 임금이 도성을 버리기까지했던 「이괄의 난」 과 만주에서 발호한 후금의 내침으로 빚어진「정묘호란」 두개의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인조5년(1627) 9월 비로소 벼슬에서 벗어 났다. 나이 80세. 관직에서 물러난 이원익은 서울 오류동에 터를 잡아 작은 논배미를 구해 왕골을 심어 가꿔 돗자리를 엮어 팔아 생계를 이었는데, 88세로 숨을 거둘때 까지 그 일을 멈추질 않았다.
효종 임금이 세자시절, 명망 높은 이정승을 찾아 보는데, 비바람을 제대로 가리지 못 할 것 같은 작은 초옥에 허리 굽은 늙은 노인이 쭈그리고 앉아 주름 투성이 손을 부지런히 놀리며 자리 엮는 모습을 몰래 지켜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 인조12년(1634) 정월. 이원익이 숨을 모았는데 한평생 벼슬 밭에 살고도 남긴게 아무 것도 없다는 그의 부음을 전해들은 인조는, “정승 노릇 40년에 그토록 가난했단 말이냐!”며 목메어했다.
경기도 광명 소하2동 서독산에 부인 영일정씨와 쌍분으로 된 묘소가 경기도 기념물 85호로 관리되고 있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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