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103

(주)하동신문 0 4,658

떡잎부터 탐졌던 굵은 호박넝쿨은 큰 호박을 매단다. 콩싹이 솟을 때 떡잎을 보고 장래의 콩깍지를 점친다. 사람도 어릴 때 기품을 보고「싹수있어 보인다」던지, 아니면 「싹수가 노랗다」 며 내려 봐 버린다.
가닥이 잡혀있지 않았던 명종의 후임 대통으로 선조(宣祖)를 전격 등극시켜, 후임 왕이 상복을 벗을 때까지 26일 동안, 재상으로 국사(國事)를 도맡아 위기의 정국을 바로 잡은 이준경(李浚慶)은, 임기(臨機) 대응력이 뛰어난 탁월한 원상(院相)이었다.
이준경의 본관은 광주(廣州), 연산군에게 죽음을 당한 예조판서 이세좌(李世佐)의 손자. 아버지는 할아버지 죄에 얽혀 「난신연좌례(亂臣緣坐例)」 로 효수(梟首)당해 버린 이수정(李守貞), 그때 이수정의 신분은 나이 28세, 관직이 홍문관수찬이라 앞길 팔팔하던 때. 둘째로 태어난 이준경은 겨우 여섯 살 된 어린애였고, 어머니 신씨(申氏)는 연산의 애첩 장녹수(張祿水) 몸종으로 배분(配分) 당해버렸다.
『증오(憎惡)가 변질 되는 순간, 인간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 했던가. 연산군이 딱 그 짝이었다. 형방승지로 어명(御命)을 받아「폐비에게 약사발을 가져 갔다」는, 10년도 더 지난 「적법했던 옛 일」 을 들춰, 거제로 귀양 보냈던 이세좌를 남해로 옮기라더니, 맘을 바꿔 중도에 자결로 목숨을 끊으라했다.
이세좌는 남해 가까운 오늘날의 하동 진교면 양포에 다달아, 명색이 어명이라 피 할길 없어 목을 매 죽고 말았다. 분이 덜 풀렸던지 연산군은 그의 아들들 수원(守元)·수형(守亨)·수의(守義)·수정 등 네 형제 마져 모조리 목을 잘라 거리에 매달아 버리니, 나이 30대 이쪽 저쪽으로 모두가 과거에 올라 벼슬길에 들었던 이들의 처참한 죽음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한결 같이 눈시울을 적시며 애달퍼했다.
『땅위의 모든 생명체는 역경(逆境)을 이겨 내며 산다』 했지만, 천애의 고아가 돼 버린 이준경과 그의 형 윤경(潤慶) 형제는, 너무 일찍 쓰라린 고통을 겪어야했다. 
그들 형제는 난신의 손자이긴 해도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죽이지는 않고 충청도 괴산으로 귀양 보내는 처분을 받아 목숨은 잇게 되니 그나마 하늘이 도운 셈이었다.
이준경의 남다른 면모는 여섯 살 어린애 시절의 귀양살이에서 들어났다.
차거운 겨울 날씨의 어느날 아침, 옷에 득실거리는 이 때문에 잠을 설친 형제는, 눈에 잠이 서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윤경은 곧장 옷을 벗어 뒤집어 눈을 비벼가며 엄지 손톱으로 이를 짓이겨 죽이느라 바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 보던 아우 준경은 「좋은 수가 있다」며, 걸쳤던 옷가지를 모두 벗어 모닥불에 태워 버리자했다.
아우의 말 대로 형제는 모닥불을 피워 입고있던 옷을 벗어 몽땅 불속에 던진 채 알몸으로 불 옆에서 오들 오들 떨고있었다.
마침 두 소년을 점검하는 시간 맞춰 들린 관원이 그 꼴을 보고 그냥 둘 수 없어, 새 옷을 챙겨 입게 하니, 형제는 이를 잡는 수고를 덜고 귀찮게 굴던 이를 시원스럽게 완전 소탕 할 수있었다. 이준경의 타고난 기지(機智)가 이때 나타났던 것이다.
중종 즉위년(1506) 이른바 중종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 여덟 살 이준경, 한 살 많은 그 형이 같이 살아 돌아오니, 어머니는 아비 잃은 어린 것들을 두고 속으로는 울먹이며 엄하고 모질게 다그쳤다.
“과부 자식과는 사귀질 말라했다.
그러니 너희는 정신 차려 남보다 열배 더 부지런히하고 더 삼가하지 않으면 사람이라 이르지 못하리라!”
어머니의 가르침을 뼛속 깊히 새긴 형제는 학문에 매진, 이준경은 중종26년(1531) 33세 때 문과에 올라 한림(翰林)으로 벼슬길에 들었고, 형 윤경은 그 보다 3년 뒤에 과거에 올라 출사, 홀몸으로 노심초사 애쓰시다가 이미 세상을 뜬 어머니의 혼령을 위로했다.
관직에서 내 외직을 두루 섭렵하며 수완과 인품을 과시한 이준경은, 명종20년(1565) 66세로 영의정에 올라 민생 안정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고려 충신 정몽주(鄭夢周) 후손을 챙겨기용하고, 조광조(趙光祖)의 죄를 벗기는 한편, 권력을 부린 윤원형(尹元衡) 무리들 관작을 추탈 할 것과, 재해를 입은 농민들 세공(歲貢)을 덜어 줄 것을 건의하여 모두 시행 토록하는 등, 개혁정책을 펼쳐 백성들의 찬사를 받았다. 선조4년(1571) 영의정에서 물러난 이준경은, 이듬해 7월 7일 세상을 떴는데, 임종 직전 왕에게「붕당 조심」을 건의, 젊은 신료들의 비난을 샀다.
향년 73세. 역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준경은 중종·인종·명종·선조에 이르기까지 4조에 걸쳐 명신으로 노성한 인물이다. 앞을 내다 보는 안목이 후진 사류들과 달라 젊은이들에게 비방을 받았다.
그러나 상신(相臣)의 업적으론 그가 제일이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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