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야기(98)금성면 가덕리 편

(주)하동신문 60 5,677


윤장군은 가덕리 632-1번지에서 무오년에 출생했다. 파평윤씨 소정공파 휘 학대 윤관장군의 23대손이며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각 도별로 장사대회가 있었는데 윤장사는 경상도 대표로 선발되어 한양으로 올라갔다.
팔도장사가 다 모였는데 첫째 사범으로 큰 말(馬)을 한 필 몰고 와서 이 말을 한 손으로 들어보라는 령이 내려졌다. 첫번째 충청도 장사가 드는데 말 한 발만 땅에서 들어올렸고, 전라도 장사는 두 발, 강원도 장사는 한 발도 땅에서 떼지 못했는데, 경상도 장사 윤장사는 두 손가락으로 말코를 딱 집어 잡더리 훨쩍 공중으로 들어서 때기 치 듯 하여 세 번이나 거듭 하였더니, 그 힘에 모두가 아연실색 하였다.
그 현상을 보고 있던 남은 다른 도 대표들은 모두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다.
윤장군은 고향인 가덕리 고단(古壇)에 살면서도 힘자랑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보통 사람처럼 노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노병으로 모친이 그만 세상을 뜨게 되어 그 장지를 명덕 신사등 밑에다 정해, 놓고 오일장을 치르려고 하였는데, 명덕 사람들이 그 곳에 묘 쓰는 것을 반대하여 온 동민이 단합하여 매장을 못하도록 지름이 5치, 길이가 세 발이나 되는 큰 말뚝을 묘자리 둘레에다 세 겹이나 총총 박아놓고, 동아줄 같은 칡넝쿨로 얽어 놓고 상여가 얼씬도 못하도록 동민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오일차되는 날에 윤장군의 모친 시신을 실은 상여가 상주들의 통곡속에 가까이 도달하여 보니, 그 지경이 되어 있어 통곡 중에 분노한 윤장군은 상복을 걷어 올리고 상여 앞으로 달려가서 한 손으로 동아줄을 잡아당기니 그 단단히 박힌 세 겹줄의 큰 말뚝들이 모두 뽑혀, 쓸린 것을 한쪽으로 걷어치우니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주민들이 놀라서 모두 각처로 흩어져 간 후에 모친의 시신을 안장케 하고 돌아왔다 한다.
그 후 윤장군도 세월이 지나 늙고 병들어 죽게 되니 고단의 앞산 정상에다 매장 하였는데, 그 묘지가 좋지 않다는 지관들의 말을 듣고 이장을 하려고 묘를 파보니 살은 썩어 다 없어지고 뼈만 남았는데, 그 뼈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문고리처럼 고리 뼈로 연결되어 있더라고 했다.
이장지는 가덕리 오리골 속등 선산인데 임좌(壬座)로 안장되었다.
얼마나 유명했던지 이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위에서 윤 장사는 윤 장군으로 불리어지고 심심찮게 그 명성을 높여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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