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탐방 106>최석정(崔錫鼎:1646~1715)-여덟번 영상에 오른 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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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가 하동문화 원장

숙종27년(1701) 6월, 최석정(崔錫鼎)이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병자호란때 명성을 날린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의 손자로, 한성좌윤 최후량(崔後亮)의 아들로 태어나 응교 최후상(崔後尙)에게 입양 되었다.
아홉 살 때 <시경>·<서경>을 외웠고, 12세에 <주역>을 풀어 신동으로 알려진 최석정은, 영의정 남구만,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에게서 배웠고, 도학자 박세채(朴世采)와 어울려 학문에 잠심(潛心)하였다.
그는 진사시에 장원하고 생원시에도 올라, 현종12년(1671) 25세 때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들어가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는 여러 직위를 거쳐 홍문관에 재직 중,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과 다투던 승지 오도일(吳道一)을 감싸다가, 그만 직위를 빼앗기기도 했고, 숙종2년(1676) 남인의 거두 윤휴(尹휴)를 비난하던 당시 좌의정 김수항(金壽恒)을 옹호했다가, 당파싸움에 말려들어 조정에서 퇴출 되기도 했다.
숙종6년(1680) 잦은 정변으로 다시 동부승지에 발탁된 최석정은, 안동부사 등을 역임하다가 양부모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숙종11년(1685)치상을 마치고 부제학으로 복직, 한성판윤·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는 지방 수령으로 나가서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희빈장씨의 오라비 장희재 처형을 주장했으며, 이조판서 때는 서얼출신을 등용하자는 건의를 하기도 하였다.
숙종23년(1697) 3월, 최석정은 우의정에 올라 이듬해 붕당의 폐단을 논하고, 당쟁을 완화하기 위하여, 권부에서 밀려난 남인들을 골라 쓰자고 주장하였다가, 노론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파직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해 곧 복직하여, 노산군(魯山君)의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으로 추봉하자는 주장을 펴 일을 성사시키니, 비로소 비운의 노산군이 늦게나마 ‘단종’으로 봉해졌던 것이다.
곧 좌의정에 올랐다가 숙종27년(1701) 6월, 56세 나이로 영의정에 오른 최석정은. 이때 장희빈을 처형해야 한다는 논의 끝에 사약이 내려지자 ‘왕세자의 생모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극력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정치의 혼탁함은 붕당 때문이라기 보다, 도학이 쇠퇴하였기 때문이라며, 도학의 중흥을 주장하는 등, 정적들의 비위를 거스리는 소신을 폈다가, 끝내 파직 당해 충청도 진천에 은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석정은 이듬해 다시 영의정으로 발탁 된 이후, 숙종37년(1711) 치사(致仕)하기까지 무려 10여차례 재상자리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가운데, 영의정 자리는 여덟번을 거듭하며 국정에 가담 되었다.
그는 노론·소론이 극심하게 대립, 정치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소론의 영수로, 숱한 고초와 난관을 겪은 비운의 정치가였다. 그는 학문이 깊어, 일찍이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양명학(陽明學)의 대가이던 정제두(鄭齊斗)와 함께 양명학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최석정은 저서로 <경세정운도설(經世正韻圖說)>·<예기유편(禮記類編)>을 썼는데, <예기유편>의 내용이 주자(朱子)의 뜻과 다르다고 트집잡은 노론 일파의 강력한 집중공격이 잇따르자 그만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다가, 숙종41년(1715) 기로소에 들었고, 그해 70세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문정공(文貞公)으로 시호가 내려진 그의 묘소는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고, 뒤에 그의 혼백은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부질없는 당파싸움으로 조선은 어둠을 헤매고 있을 때, 국제정세는 사뭇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1670년 영국에는 휘그·토리 두개 정당이 결성되어, 민주주의의 기본 틀인 정당정치가 시작되니, 우리의 당파와는 성격이 판이한 국민을 위한 정당이었다. 1675년 그리니치 천문대가 개설 되었고, 1695년 프랑스는 출판의 자유를 허용했다. 1701년 미국에 예일대학이 창립 되었는가 하면, 1705년 러시아 모스코바 대학이 개설 되었다. 1709년 이탈리아에서 피아노가 발명되었고, 이듬해 프랑스는 베르사이유궁전을 준공하였다. 이러한 세계의 흐름 속에서 조선은 오직 청나라와 일본의 눈치만 살필 뿐, 국제정세에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주자학 글자 풀이에만 매달려 세상 돌아가는 줄을 몰랐다.
새로운 학문으로 쇠퇴한 도학을 중흥시켜, 혼란스런 정치판도를 바꾸어 보려했다가 결국 반대세력의 저항으로 실패한 최석정은, 겉으로는 화평하나 안으로는 강건한 외유내강의 성격으로, 마음속에 불편한 심기가 가득해도 밖으로 싶게 들어 내질 않았다. 그는 사명감이 높아 명분론에 집착하지 않았고, 백성의 어려움을 덜고 정치적 폐단을 적극적으로 고쳐 나가려했던 행정가였으며, 당파싸움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려고 자신의 안위와 손익을 따지지 않았던 큰 정치가였다. 최석정의 아우 최석항(崔錫恒)은 영조때 좌의정에 올라, 형제정승 가문을 일구었고, 최석정의 아들 최창대(崔昌大)는 대사성·부제학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