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탐방 113>최규서(崔奎瑞:1650~1735)-일사부정(一絲扶鼎)의 청백리 11.11
정 연 가(하동문화원장) 경종2년(1722) 12월, 소론의 영수로 떠올라 노론4대신을 내치는데 영의정 조태구와 함께 힘을 합했던 최규서가, 조태구의 후임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고려때 해동공자로 명성이 높던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본관이 해주, 세종의 한글창제를 극구 반대했던 청백리 최만리(崔萬理)의 9대손이며, 선조때 시인으로 대문장가였던 최경창(崔慶昌)의 현손, 아버지는 현감 최석유(..
<조선왕조 뒷 이야기> 42 박일산(朴壹珊) 12.21
박일산은 사육신 가운데 한 인물이던 박팽년(朴彭年)의 손자다. 그의 첫 이름은 박비(朴婢)였으니, 일러 박가 성을 지닌 노비라는 뜻이었다.단종 복위 실패로 인해 멸족 당한 사육신들 가운데 유일하게 박팽년은, 무던한 몸종의 눈물겨운 정성으로 후손을 두게 되었었다.본관은 순천, 세종때 문과에 오르고 뒤에 중시(重試)에 뽑혀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박팽년은, 수양대군이 억지로 등극 할때 형조참판(법..
<조선왕조 뒷 이야기>126 양사언(楊士彦) 어머니 02.11
시조 「태산가(泰山歌)」 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어릴 때 익혀 즐겨 애송했고, 선비들은 청아한 소리로 즐겨 읊는 국민 고시조(古時調)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다분히 만인에게 「노력하면 안될게 없다」 는 만고의 교훈을 주는 불멸의 민족 문학 작품이라 할 수있다.태산가를 쓴 양사언의 본관은 청주, 아버지는 돈령주부(敦寧主簿) 양희수(楊希洙)로 중종12년(1517)에 태어났다. ..
<조선왕조 뒷 이야기 120> 이순신장군 혈통 12.11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죽으려하면 살고 살려하면 죽는다!』 임진왜란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명장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절묘한 좌우명이다. 따지고 보면 장군의 승전 비결은 「목숨을 건 싸움」 이었다. 그는 어려서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다가, 말을 듣지 않은 친구를 활로 쏘아 한쪽 눈을 못쓰게 만들어 버리기도했다. 임진란 최초의 전투 옥포해전 출진을 앞둔 전날 밤 여수(麗水)..
<조선왕조 뒷 이야기> 38 세종의 아들 딸들 11.16
대왕 세종은 조선조 제왕들 가운데 아들을 가장 많이 둔 왕이었다. 정비(正妃)에서 8남 2녀, 다섯 후궁에서 10남 2녀를 두었으니, 전체 18남 4녀였다. 통털어 따진다면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 정비에서 4남 4녀, 아홉 후궁에게서 8남 13녀를 얻어, 모두 12남 17녀였으니, 세종보다 자녀수는 많았으나, 왕자는 단연 세종이 많이 거느렸다. 따라서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는 대군 여덟, ..
<조선왕조 뒷 이야기>125 02.03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선조26년(1593) 7월 7일, 진주 남강에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부실(副室) 논개가 사납던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忖六助) 허리를 껴안고 굽이치는 강물에 몸을 던저 순절하였다. 꽃다운 나이 20세. 그러나 여자를 사람으로 보질 않던 그시대 양반들의 편견(偏見)은 그의 거룩한 죽음을 모른척해 버렸다.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장한「죽음」이 140여년..
<조선왕조 뒷 이야기>124 두려운 것은「기록」이다. 01.21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든 누군가가 보고 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그의 자서전에 남긴 말이다. 들어 둘 명언이다. 한때 시대의 중심에 섰던 이들은 즐겨 회고록을 남긴다. 김구(金九)선생의 <백범일지>,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이 쓴 <외로운 선택의 나날>,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노태우 회고록>, 두권의 회고록을 남긴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
<조선왕조 뒷 이야기>127 임진란 최초 의병장 03.27
선조25년(1592) 4월 14일 반도 남단 부산포에 왜적들이 기어올라 난리가 났다. 떼거지로 미친 들짐승 같은 왜놈들이 고을에 들이 닥쳐 함부로 사람들을 해치며 분탕질했다. 세상이 그야 말로 난장판으로 변한 그 때 오늘날의 경상도 의령 시골에서 한가로이 세월을 보내던 곽재우(郭再祐)는 마침내 거병(擧兵)을 결심,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외쳤다.“왜적이 이미 가까이 다가오니 우리의 부모처자..
<조선왕조 뒷 이야기>122 조헌(趙憲)과 그의 아들 01.02
나라를 위한 충심에서 바른 뜻을 담아 자주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이 용납하질 않으니, 신하 노릇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관직을 버리고 유학(儒學)에 몰두하던 조헌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분연히 문도(門徒)들을 의병으로 모아 왜적과 맞섰다. 그는 마침내 금산(錦山)전투에서 700명 의병들과 함께 장렬히 순국해버린 강직한 충신이며 학자요 의병장으로 이름을 남겼다. 선조 말엽의 문필가 권필(權필)이 언..
<조선왕조 뒷 이야기> 119 아우를 살린 형 11.21
선조21년(1588) 무렵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의 일로 전해오는 이야기다. 그때 국방에대한 책임은 병조판서 유성룡(柳成龍)이 맡고있었다. 비록 국정 최고의 위치에는 못 미치는 판서 자리에 머물렀으나, 나라의 중요 정책이 유성룡의 머리에서 나오는 지경에 이르러 이웃 일본·중국에서 까지 유성룡을 조선의 인재로 여기는 바가 되었다.유성룡의 본관은 풍산,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유중영(柳仲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