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칼럼

하동춘추 33 하동 유학(儒學)을 이끈 안계(安溪)의 큰 선비들 도비 문찬인

하동신문 0 305

하동춘추 33

 

 

하동 유학(儒學)을 이끈 안계(安溪)의 큰 선비들

 

도비 문찬인

 

옛날부터 진주에서 이름난 마을을 꼽을 때 “첫 번째가 안계(安溪)요, 두번째가 원당(元堂)이요, 세 번째가 사월(沙月)이다.”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지금의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안계마을이 진주목(晉州牧)에 속했기 때문에 진주의 으뜸가는 명촌(名村)으로 일컬어졌던 것이다. 안계마을이 그런 명성을 얻은 것은 풍경이 수려하고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이기 때문이다.

안계마을을 감싸고 있는 사림산(士林山)은 지리산의 산맥이 동남쪽으로 힘차게 100여 리를 뻗어 내려와 형성된 산이다. 산의 형상이 선비를 닮았다하여 이름 붙여졌다.

사림산 아래에서 학식과 덕망이 탁월한 선비들이 대를 이어 배출되어 조선중후기 남명학의 발흥지가 된다.

전병철의 [하동유학의맥]에 의하면 하동에서 문집을 남기고 강학활동을 한 유학자는 30여명에 이르는데. 

이중 옥종면 출신이 21명이고 그중에서도 안계마을 출신이 11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래서 안계마을을 하동유학의 산실이라 부르는 것이다

하동 유학의 최고봉은 누가뭐래도 안계마을의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1593~1666)이다. 그는 ‘남명 이후 제일인자’로 추앙될 만큼 학덕이 높았으며, 경상우도 지역의 정신적 지주였다. 하홍도는 남명학의 핵심을 전수받아 후대에 이어지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안계마을 안쪽 계곡을 안식골(安息골)이라고 부르는데, 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고 있다. 그 아래에 모한재(慕寒齋)가 있으니, 바로 하홍도가 독서와 강학을 하던 곳이다. 

재실의 이름을 ‘모한(慕寒)’이라 지은 까닭은 주자(朱子)의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사모했기 때문이다. 

하홍도는 모한재에서 강학을 하면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당대 명사들과 두루 교유하였다. 특히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깊이 나누었다. 

지금도 모한재에는 허목이 쓴 현판과 기문이 걸려 있다. 또한 하홍도가 거닐며 시를 읊조리던 영귀대(咏歸臺)의 암벽에도 허목이 쓴 글씨의 각자(刻字)가 남아 있다.

하홍도의 학문은 설창(雪牕) 하철(河澈1635~1704)과 삼함재(三緘齋) 김명겸(金命兼1635~1689)을 거쳐 주담(珠潭) 김성운(金聖運1673~1730)과 지명당(知命堂) 하세응(河世應1671~1727)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하세응의 학문은 태와(台窩) 하필청(河必淸1701~1758)에게 전수되어 남고(南皐) 이지용(李志容1753~1831), 월포(月浦) 이우빈(李佑贇1792~1855) 등을 거쳐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1870~1946])에게로 전해졌다. 

모한재는 하홍도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계속적으로 이어져 강학 활동이 이루어졌다. 

해사(海史) 정돈균(鄭敦均)이 모한재로 찾아가 월촌(月村) 하달홍(河達弘)에게 수학하였는데, 당시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와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등도 함께 문하에서 배웠다. 

1879년(고종 16)에는 두산(斗山) 강병주(姜柄周)와 최숙민 등이 모한재에 모여 강학을 하였다. 니곡(尼谷) 하응로(河應魯)는 모한재의 유계(儒契)를 복원하고 거금을 모아 1912년 모한재에서 『겸재집(謙齋集)』을 중간하였다. 

1915년 담헌(澹軒) 하우선(河禹善)은 벗들과 함께 모한재에서 강학을 했으며, 1927년에는 굴천(屈川) 이일해(李一海)[1905~1987]가 여러 벗과 함께 모한재에서 학문을 강마하였다. 

이처럼 안계의 모한재는 하동 지역 유학자들이 세대를 이어서 학문을 강론하고 심신을 수양한 곳으로, 하동 유학의 중심지이자 하동 유학자의 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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