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칼럼

효도계약 시대 심홍규 -웰다잉 전문강사

하동신문 0 257

효도계약 시대

심홍규 -웰다잉 전문강사

 

문득 에스토니아의 오래된 격언이 생각난다. “아버지의 품안에는 아홉 자식이 있을 곳이 있지만, 아홉 자식의 어느 품안에도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없다.”안타깝게도 효도 계약시대를 맞이했다.

늙은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자녀가 늘어나자“불효자방지법”이 발의되더니 이제는 “효도 각서” 서식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젊은 세대와 달리 50~60대는 힘이 들어도“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효도세대들이다. 이들이 죽고 나면 이 땅에서“부모 봉양”이라는 말이 남아있기나 할지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참 씁쓸하다. 부모와 자식사이에 효도계약이 필요한가하는 설문조사에 28%가 필요다고 나타났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부모 봉양은 언젠가부터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명절 때나 찾아뵈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식이 많아졌다. 하지만 현재 부모 세대는 자녀들의 정기 방문의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법으로 효도와 부양의무에 대해 규정하고 이것을 따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소통을 통해 갈등을 줄이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가는 게 더 중요할 것 같다. 전문가들은 재화 상속뿐만 아니라 “가치상속”에 눈뜨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 한다. 우리 보다 먼저 고령화를 겪은 일본이나 선진국인 미국에서는 가문의 명예, 정신, 가치관을 승계하는 문화가 정착돼있다. 이런 무형의 가치를 발전시키는 것이 상속의 본래 취라고 한다. 중장년은 교과서 속 어머니의 마음을 늘 반대로만 하다 마지막에 후회하는 “청개구리의 슬픔” 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효도를 배웠다. “의좋은 형제”를 통해 우애도 익혔다. 이제 그 유효기간이 끝나간다. 효는 당연히 지켜야할 인륜이라는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재판장에서 자식과 부모가 법정에서 어색하게 등을 돌리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재판이 열리는 동안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 “효도 계약”이 본격 등장한 것은 2015년이다. 그해 12월 대법원은 부모를 잘 모신다는 조건으로 부동산을 물려받고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재산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이런 다툼을 막으려고 “효도계약”을 맺기 시작했다. 당시 대법원은 효도계약이 증여 계약을 해제 할 수 있는 부담부증여(負擔附贈與)라고 판단해 길을 터줬다. 한국 가정법률 상담소에 접수된 부양 관련 상담건수는 해마다 증폭하고 있다고 한다. 부모와 자식이 부양문제로 갈등하며 법정 소송을 벌이는 사례가 10년 전150여건에서 지난해 255건으로 늘었다고 한다. 대부분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증여했는데 왜 모르는 체 하느냐며 토해내거나 부양을 책임지라고 다툰다. 차마 법적 대응은 못하고 가슴앓이 하는 경우까지 더하면 부지기수다. 이제 자녀의 일방적 희생을 전제로 한 효 문화는 낡은 개념이 됐다. 삶의 방식도 자기중심적으로 변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 정신적 유산을 갚기에는 벅차다. 앞가림하기도 힘들다. 부모의  노후보다 자신의 앞날이 걱정이다. 이기적이라고 나무랄 수 없는 노릇이다. 팍팍한 산림에 용돈 드릴 여력이 없다. 어버이날 선물보다 어린이날 장난감 챙기는 게 우선순위가 됐다. 시대가 변했으니 효 문화가 변한 건 당연하다. 효도의 근본은 무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이다. 걱정 끼치지 않은 것만도 효도다. 부모님을 찾아뵙기 어려우면 안부전화라도 자주 하는 것이 첩경이다.

 눈부시게 화려한 가을 단풍이 갈색으로 물들고 있다. 이어서 가슴에 품었던 가을은 사라지고 바야흐로 곧 겨울이 시작 될 것이다. 이제 두 달만 지나면 또 새해가 된다. 과연 나는 불어난 나이만큼 효에 대한생각이 더 현명해졌을까? 문득 창밖을 바라보며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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